죽비소리 |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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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1-14 16:03 조회3,29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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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삶 살겠다는 초심(初心)이 새로운 시각 열어”
새로운 희망으로 평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는 새해 벽두에 심사가 편하지만 않다. 코로나19는 좀 진정되려나, 경제는 나아지려나, 대통령 선거로 대변되는 정치권의 변화는 어떠려나 하는 염려들 때문이다. 특별한 일 없이 무탈하기만 해도 좋겠다 싶다가도 더 나은 변화를 위한 열망과 몸부림이 보이는 것은 아직도 젊다는 뜻인가, 아니면 지금 이 자리가 평안하지 못하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다가도 그것이 곧 새로운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으며 위안을 삼아 본다.
날마다 새로운 날이고 순간순간 새로운 순간이니 나도 세상도 변한다. 그러한 변화에 수순함은 변화를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리거나 바라보는 일만은 아니다. 바람직스러운 변화를 위해 그만한 조건을 성숙시키는 일도 포함된다. 그 시작은 무엇보다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인 것 같다. 과연 나는 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지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을 거울로 삼아 비춰본다.
경전을 보다가 다른 인도철학과 불교의 차이, 즉 아(我)와 무아(無我) 사이의 구별이 중요함을 지적하는 대목이 눈에 띄었다. 중생이나 보살의 그 성품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행위에 의해 중생이 되기도 하고 보살이 되기도 한다는 가르침이다. 즉 무아이기 때문에 마음 씀씀이를 어떻게 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우바새계경> 앞부분을 보자. “누군가 말하되 ‘모든 중생들에게 보살의 성품이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성품이 있다면 곧 마땅히 선한 행위와 인연을 닦지 않고도 여섯 방향에 공양을 올리리라... 무량한 선한 행위와 인연을 쓰는 까닭으로 보리심을 내면 보살의 성품이라 한다... 만약 정해진 성품이 있다면 이미 성문이나 연각의 마음을 낸 이는 능히 보리심을 내지 못할 것이다.”
개에게 불성이 있는가?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 주장에 적용해 본다면 불성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에 집착함이 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존재는 불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고 해도 ‘아’에 집착함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개에게 불성이 있느냐 할 때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결론을 내면 안 된다. ‘이것’이나 ‘저것’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아’에 집착함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중간’이라 해도 옳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독립적으로 항상하게 변치 않고 있다는 실체론적 생각은 불교적이지 못한 사고다. 모든 것이 독립적이지 않고 조건에 의해 잠시 무상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게 불교의 연기 무아적 사고다. 연기적 사고를 유지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든 부처님 같은 확고한 지혜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꾸준히 탐구하는 탐구자적 자세일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최선인가?’ 하는 생각이어야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마련하기 때문이다.
경계할 것은 새롭게 바라본 것에도 집착하여 머물면 이 또한 고착되어 또 하나의 ‘아’에 묶일 수 있다는 점이다. 선지식에 의해 시설된 법을 깨달아 자아에 대한 고집인 아집(我執)을 놓더라도 다시 그 마음에 집착하면 옳다는 데에 대한 집착인 법집(法執)이 되어 버린다. 아집을 벗어난 소승에서 한 발 나아가야 법집을 벗어난 대승의 발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늘 타성에 젖어 살기 일쑤다. 어제의 잣대로 오늘을 재려하니 맞지 않아 당혹스러워하기도 하고 서로 갈등하기도 한다. 그래서 초심(初心=初發心)을 챙기는 자세가 요긴하다. 초심은 더 이상 기존 방식대로 살지 않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한 마음이다. 새해 우리는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어제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오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일의 나를 결정하는 만큼 순간순간 초심으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