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 율곡매栗谷梅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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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2-05-27 15:38 조회2,973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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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느낌으로 먼저 와서 여린 빛깔로, 아련한 향기로 피어나는 봄. 온몸에 와 감기는 바람이 온통 봄이다. 순천 선암사 선암매(천연기념물 제488호), 구례 화엄사 매화(천연기념물 제485호), 장성 백양사 고불매(천연기념물 제486호)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매화로 꼽히는 강릉 오죽헌 ‘율곡매(천연기념물 제484호)’의 봄을 만나기 위해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길을 나선다.
오죽헌(보물 제165호) 초입,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은행나무가 연둣빛 여린 움을 키우고 있는 길을 따라 들어선 오죽헌 뜨락. 딱 이 즈음이면 이곳을 그윽하게 물들이던 꽃과 향기…, 그러나 올해는 모든 것이 예전만 못하다.
1400년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수령 600여 년의 이 나무는 유독 매화를 좋아했던 사임당이 매우 아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형이 아름답고 역사성과 학술 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나 수년 전 기록적인 폭설에 가지가 부러지는 수난을 겪은 데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90%가 고사한 상태다. 지난해에는 문화재청의 천연기념물 지정 해제 검토 대상에 오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도 생육환경 개선과 뿌리 치료 등을 통해 잔존 수명을 늘린다는 전제하에 천연기념물로서의 품격을 유지하게 되었다. 율곡매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나 될까. 빈약하지만 서서히 죽어가면서도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모습으로, 자신의 향기로 피어난 꽃은 아름다움을 넘어 처연하기까지 하다. 고결高潔, 지조志操, 인고忍苦라는 꽃말처럼 600여 번의 겨울을 거치는 동안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새 움을 틔우고 꽃을 잉태했을 율곡매의 시간이 그래서 더 장엄하고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사람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게 나무의 속내인 것 같다. 율곡매가 그러하듯 앙상한 가지로 남은 겨울나무는 소나무처럼 사철 푸른 몇몇 나무를 빼고는 대부분 이름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여름내 품어왔던 색깔의 절정도, 비와 바람을 견디면서 애써 키우고 살찌운 열매까지도 미련 없이 툭 툭 떨어뜨린 나무 위로 눈이 쌓이고, 알몸의 나무가 견뎌내는 침묵의 시간만큼 겨울이 깊어진다.
나무에게도 혹한의 끝에서 처음인 듯 어김없이 싹을 틔우던 봄날이 있었다. 아기 손바닥처럼 여리던 잎이 햇살 아래 초록을 더하며 무성해지고, 어떤 나무는 저마다의 이름대로 꽃을 피우고 또 어떤 나무는 그 이름에 걸맞은 열매를 맺었을 여름날도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맛있는 과일이나 귀한 열매를 만들어내는 건 대부분 작은 꽃이었다. 꽃잎도 여린 홑꽃잎이 많다. 화려한 꽃은 몸치장하느라 바쁜 탓에, 부지런히 물을 빨아올리고 햇빛을 모아 영양분을 만들 겨를이 없었겠다. 주변을 풍요롭고 살맛나게 하는 것이 올챙이 적 잊지 않고, 앉을 때와 설 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의 힘인 것처럼 숲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벌레를 먹인 나뭇잎’,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의 희생이다.
저 혼자 온 산을 차지한 나무는 없다. 저 혼자 우뚝 큰 나무 밑에는 올망졸망 함께 자라는 나무가 없다. 그림자가 크고 짙으면 어린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잎이 너무 우거져도 하늘을 볼 수 없다.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경쟁하는 숲에는 희망이 없다. 햇볕이 닿지 못하는 음습한 땅에서 뭇 생명이 건강하게 자랄 리 없고, 어린 나무와 가녀린 풀꽃이 자라기 힘든 곳이라면 작은 곤충조차 발붙일 공간조차 생기기 어렵다. 저마다 기세를 떨치기보다는 열 그루 중 세 그루쯤 빈자리를 남겨둬야 여러 나무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건강한 숲이 된단다. 바람과 햇볕이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새 생명을 품을 수 있단다.
사람의 속내도 나무를 닮았다. 사계절을 두루 지나면서 차츰 나무의 면면을 알게 되는 것처럼 사람도 어느 즈음이 지나서야 제 색깔을 볼 수 있게 된다. 천수천형千樹千形, 천 가지 나무에 천 가지 모양이 있다는 말처럼 평범한 한 그루 매화나무의 최선이 사임당과 율곡 모자의 숨결과 더해져 우아한 기품을 지닌 율곡매로 거듭난 것이다. 오늘의 율곡매를 만든 것은 수백 년의 세월 동안 수천, 수만 가지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묵묵히 꽃과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온 나무의 순응이다.
사람을 만드는 건 마음의 결이다. 같은 하늘, 같은 바람, 같은 물이라고 하여 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으니 마음의 결이 또 하나의 창조주인 셈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쩌면 숲의 빈자리에 노심초사하는 갑남을녀들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앞에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 피부로 느껴지는 것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느라 작은 결핍이 주는 삶의 충만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율곡매가 살아낸 인고의 세월 속에 수많은 하루, 수많은 오늘이 켜켜이 쌓여 있다는 것도 헤아리지 못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웠듯 율곡매는 또 미련 없이 그 꽃을 떨어뜨리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땅속 깊은 곳에서 자양분을 끌어올리고 있을 터.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좋은 것을 버리는 일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하는 일이, 숲에게 빈자리를 내주는 것 못지않게 어려운 그 일이 단지 나무의 숙명이기만 했을까.
“복을 짓는 것은 오직 마음에 있다. 거친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걱정과 티가 없어 안온한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다. 『숫타니파타』” 라는 말씀에 기대어 세월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율곡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숲에 빈자리가 필요한 것처럼 사람살이에도 빈자리가 필요하다고.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오늘 보고 듣고 느껴야 할 아름다움을 놓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라고. 오래된 나무일수록 점차 속이 비어 가지만 비움으로써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다고. 그릇이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듯, 비어 있음으로써 쓸모가 있다는 노자의 말처럼 속이 비어 있어야만 만들 수 있는 깊은 울림, 영겁의 세월이 만들어 낸 진리가 있다고.
내년에도 율곡매의 개화를 볼 수 있기를. 돌아서는 발걸음이 못내 아쉬운 나는 아직도 순응을 배우지 못한 속인俗人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