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소리 | 공감(共感)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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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1-11-15 12:25 조회3,501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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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은 무아(無我)와 대아(大我)를 실천하는 길”
공감이 화두다. 공감대를 확보한 콘텐츠는 사람마다 감상이 꼭 같지는 않아도 가슴에 파고드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다. 콘텐츠는 공감대가 확산할수록 더 돈이 되고 힘도 커진다. <기생충>이 지난해 한국영화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받더니 올해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며 각국 넷플릭스 순위에서 1위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공감의 힘은 개개인에게 의지처가 되고 개인을 집단으로 묶어 문화의 힘으로 분출된다. 우리가 공감을 원하는 것은 공감을 이룰수록 행복감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가족 친지 간의 유대나 연예인을 향한 팬심이 작동하는 원리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감의 열망은 쉽게 충족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공감이 부족할 때 다툼은 그치지 않으며 충분히 공감 받지 못해 심리적인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공감을 구걸할 일은 아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느낌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반대로 느낌은 달라도 공감대를 얼마든지 형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느낌이 다를 때면 각자 취향의 차이를 인정해주고, 누군가의 공감을 받지 못한다면 상대를 비난하기보다 자존감을 가지고 홀로서기를 하면 된다. 또 공감을 받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자신이 타인에게 얼마나 공감을 하느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주의할 점은 공감은 상대의 감정이나 생각 따위에 무조건 따르는 동감(同感)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동감을 추구하다 보면 스스로 지치게 되고, 실패할 경우 자책하게 만드는 등의 부작용을 낳는다. 이는 애초 의도한 공감과는 거리가 멀다.
공감의 흔한 기제는 더하기 방식이다. 자기가 공감할 수 있는 영역을 하나씩 확보해 나가는 일이다. 이는 보통 우리가 취하는 방식으로, 일이나 취미 따위를 함께 하며 생각이나 느낌이 비슷하다는 공감대를 하나씩 만들고 확장해 나가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빼기 방식으로, 자기만의 공감 영역을 비우는 일이다. 여기서는 특정한 공감영역에 머무르지 않으며, 다른 어떤 이질적인 느낌도 허용한다. 스스로 고집하던 심리적인 벽이 깨어지기 시작하면 상대의 생각이나 행동이 점점 인정되고 연결감도 더 크게 가질 수 있게 된다.
여기에 하나를 보태자면 본래 갖추고 있는 공감 능력과 공감대를 발견하는 일이다. 불교에서 불성, 자성, 본래면목이라고 할 때는 이러한 능력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자신을 깊이 성찰할수록 공감지수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평소에 발견하지 못했던 자신을 보다 폭넓고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주위의 관심이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생각했는데, 가만 살펴보니 어느 정도는 받은 적이 있음을 상기할 수도 있다. 다소 부족했을 수는 있지만 누구나 관계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전혀 받지 못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공감이 무엇보다 자기를 공감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불교 수행이 언제나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다루는 노력에서 출발한다는 점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동시에 이뤄지면 좋겠지만 출발은 자리가 되어야 한다. 자리가 충분히 깔리지 않으면 이타는 모래성처럼 부서지기 쉬운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무아(無我)의 가르침과 실천도 자칫 자기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를 확고히 긍정하는 일이다. 자기 또는 자기의 것이라고 여겨지는 느낌이나 생각 등을 하나하나 되살펴 보는 과정 자체가 무아를 실천하고 대아(大我)를 실천하는 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