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위드다르마 연재글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향유 | [지장스님의 향유] 어느 가을날의 꿈

페이지 정보

작성자 총지종 작성일23-10-05 15:51 조회1,801회

본문

bf94c11b331f4fa31aabe90bdb6e97a4_1696488706_2768.png
 


 요즘 전 세계적으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인간들은 고통받고 있습니다. 인간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고 희망했던 것들은 예상할 수 없이 변덕을 부리고 있으며,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요인만 빼면 이러한 일들은 사실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거나 나쁜 일이라고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자연은 무심히 자신의 일을 할 뿐입니다. 어쩌면 건강한 자연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은 인간에게 벌을 주는 것도 인간을 걱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단지 복잡한 인과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람, 비, 뜨거운 열기, 다양한 소리들, 냄새들. 지금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현상들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한 것도, 더럽고 깨끗한 것도 그리고 성스럽고 세속적인 것도 아닙니다.  모든 현상들은 오직 인간의 생각 안에서 인간중심으로 생각할 때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들은 인간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문제를 규정하며, 인간중심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자연은 그것들에 무심합니다.


 인간은 도덕이라는 관념으로 세상을 분별합니다. 세속적인 것과 성스러운 것, 표면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가짜와 진짜라는 프레임입니다. 이런 프레임은 인간에게 도덕적 갈등을 조장합니다. 성공과 성취, 욕망을 추구하며 살면서도 그런 세속적 가치에 치우쳐 사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리고 내적인, 영적인, 도덕적인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 더 본질적이고 더 행복한 길임을 제시합니다. 무엇보다 적당히 타협하여 이 두 가지 방식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최선의 길이라고 여깁니다.


 인간은 공통적으로 성찰, 겸손, 사랑, 봉사, 믿음 등의 실천 덕목을 중요시여기며, 더 나아가 본질을 깨닫거나 본질적 상태와 하나가 되는 것, 혹은 절대적 존재로부터 구원받는 것을 제시합니다. 도덕적 분별의 프레임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욕망과 무지, 더러움, 죄와 문제, 불완전한 세상으로 봅니다. 그리고 구원과 수행을 통해 가게 되는 사후세계는 깨끗하고 문제가 없고 완전한 이상적 세상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양 극단에 치우친 사고입니다. 중도는 양 극단의 조화와 균형이 아닙니다. 양 극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혜롭게 잘 아는 것입니다. 양극단이 없다고 다 없는 것으로 보는 것 또한 아닙니다. 단지 있는 그대로를 절대 긍정할 뿐입니다. 인간 인식의 스펙트럼은 천차만별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스펙트럼은 주관적 실재가 됩니다. 당사자에게는 사실이고 진리이지만 부분적이고 상대적 진리일 뿐입니다. 그것은 일반화되거나 절대화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이것들이 일반화되고 절대시되면 서로를 속고 속이는 형국이 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그런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견해와 신념이 주는 기쁨에 도취되기도 합니다. 세상이 사랑과 은총, 자비로 충만 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영혼의 플라시보가 아닐까요.


 우리 마음에는 채워야 할 어떤 내용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위안, 자기만족을 주는 내용으로 마음을 채우려 합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습니다. 그것들이 모여 점차 진리로 둔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만의 세계인 자기중심적, 주관적 세상이 형성되어 갑니다. 중국 선종의 3조 승찬 대사가 지은 <신심명>의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至道無難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唯嫌揀擇 오직 분별을 꺼릴 뿐이다.

唯滯兩邊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寧知一種 어찌 한가지임을 알 수 있겠는가.

不用求眞 참됨을 구하려 하지 말고

唯須息見 오직 망녕된 견해만 쉴지어다.

二見不住 두 견해에 머물지 말고

愼莫追尋 삼가 쫓아가 찾지 말라.

一心不生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萬法無咎 만법에 더러움도 없느니라.

無咎無法 더러움이 없으면 법도 없고

不生不心 생겨나지 않으면 마음이라는 것도 없다.


 각자의 업業에 따라 삶이라는 정답은 다릅니다. 어떤 것이 더 정답이라고 정한다는 것도 우스운 소리이지요.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답으로 보거나, 혹은 다 답이 아니라고 보면 길을 잃어버립니다. 무상無常하다는 것은 변화와 이동을 의미합니다. 방편상 나름의 방향성이 있으면 멀미를 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언가 노력을 해야 되고 쉬지 못하는 병에 걸리는 부작용도 따릅니다. 


 세상을 보는 시력과 독해력이 더 좋아지면 심리적 변화와 움직임의 거리가 줄어들 것입니다. 언젠가 심리적으로 변화와 이동이 멈추고 방향성과 좌표, 마찰, 갈등마저도 사라지는 차원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그때는 제대로 쉴 수 있겠지요. 그런 차원이 있다면 분명 지금 이 순간 여기일 것입니다. 한 바탕 꿈을 꾸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