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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자유 세계의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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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4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3-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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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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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3-10 14:48 조회 438회

본문

종교는 자유 세계의 생명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 논설


5. 인간은 왜 종교가 필요한가


(1) 사람은 다 종교(宗敎)를 믿지만은 체계(體系)있는 종교를 믿는 것이 필요(必要)하다. 다 요행(僥倖)과 천우신조(天佑神助)를 바란다. 이것은 종교적 소성(素性)이 누구에게나 잠재(潛在)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이 위급(危急)한 때를 만나면 종교적(宗敎的) 행동(行動)이 드러난다. 이러한 행동(行動)은 체계(體系)가 없으므로 미신(迷信)이고 오래 믿지도 못하게 된다. 예컨대 풍랑(風浪)을 만났을 때나 탄광(炭鑛) 중(中)에 들어가 있을 때 종교자는 절대권능(絶對權能)의 대상(對相)에 구원(救援)을 의뢰(依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는 체계가 있으므로 점점(漸漸) 착해지고 행복(幸福)하게 된다.


(2) 종교(宗敎)가 많고 종파(宗派)가 많아야 하는 필요성(必要性)

(본문 생략)


(3) 자유(自由)와 종교(宗敎)

  만약 고귀(高貴)한 사람에게 자유(自由)를 주면 반드시 그것은 착한 사람되는 조건(條件)이 될 것이나 만약 악인(惡人)에게 자유(自由)를 준다면 그 자유는 방종(放縱)으로 변(變)하여 다른 사람과 대중의 자유를 유린(蹂躪)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해독(害毒)이 크기가 짝이 없으므로 종교(宗敎)로서 선도(善導)한 후(後)에 바야흐로 자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또 자유는 곧 자주(自主)이며 자제(自制)이다. 자주(自主)는 곧 자각(自覺)이요 자제(自制) 곧 계행(戒行)이다. 선(善)을 행(行)하게 되면 곧 자주(自主)가 선다. 자제(自制)는 곧 악(惡)을 제어(制御)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자유(自由)와 종교(宗敎)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으므로 곧 자유세계의 생명이다. 


(4) 과학과 종교

  과학(科學)은 물(物)의주(主)요 종교는 심(心)의주(主)라 (도의(道義)), 물(物)과 심(心)이 상대(相對)로 병진(倂進)하면 인욕(人慾)은 점점(漸漸) 높아지고 인심은 점점 악해진다. 만약 도의(道義)가 없으면 그 악을 억누르지 못하여 (형이상학(形而上學)) 인간은 악으로서 멸망(滅亡)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다만 과학만으로서 능히 인간을 복되게는 못하는 것이다. 과학인(科學人)은 과학만능(萬能)의 자기 도취(陶醉)에서 종교를 백안시(白眼視) 하는지라. 이로써 볼진대 과학은 사람을 요익(饒益)케 하고 종교로서는 완성(完成)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회를 순화(淳化)하는데 마치 심장(心腸)과 같아서 정맥(靜脈)의 탁(濁)한 피를 심장(心腸)에서 정화(淨化)하여 온 몸에 다시 보냄과 같다. 사회의 모든 악은 종교가 정화하여 다시 사회로 보내는 것이다. 


(5) 정치(政治)와 종교(宗敎)

  정치(政治)와 종교(宗敎)는 마치 사람의 육체(肉體)와 정신(精神)과도 같다. 국법(國法)에는 죄(罪)는 벌주고 교법(敎法)은 착한 것은 상(賞)을 준다. 각각(各各) 먼저 인식(認識)이 들어가서 두려우면 악(惡)은 행(行)하지 않고 환희(歡喜)하면 스스로 선(善)을 행하게 된다. 이 두 가지가 다 선으로 인도(引導)하는 것은 하나이다. 그래서 음양이원(陰陽二元)이 상대(相對)로 표리(表裡)가 병행(倂行)하면 사반공배(事半功倍) 되는 것이다. 또한 도의심(道義心)의 앙양(昻揚)은 민중(民衆)을 더불어 교화(敎化)하고 풍속(風俗)을 화(化)케하는 중추역할(中樞役割)을 하게 되는 것도 또한 종교로부터 이것을 하는 것이다. 이런고로 자유민주국가(自由民主國家)는 정치(政治)로서 그 자유(自由)를 주는 것이고 종교는 그 양심(良心)이 하는곳에서 바야흐로 자율(自律)이 일어나고 진정한 자유 민주정치가 되는 것이니 이치(理致)가 이와 같은 즉 세계적(世界的)으로 보더라도 종교는 자유세계의 정신적 유대(紐帶)가 되어 전세계(全世界)가 하나같이되는 것이다. 각국(各國) 국민(國民)은 국민정신(精神)과 민족사상(民族史想)은 비록 다를지나 오직 신앙(信仰)하는 종교적 이념(理念)만은 공통(共通)함이 흡사(恰似)하고 생활풍속(生活風俗)은 각각 다르지마는 신앙생활(信仰生活)과 윤리감(倫理感)은 동일(同一)한 까닭이다. 이로써 본다면 정치(政治)와 종교(宗敎)는 침해(侵害)하고 지배(支配)하는 입장(立場)에서는 둘이 분리(分離)해 있으나 오직 정치와 종교는 일치 협조(協助)하여 민심을 능(能)히 수렴(收斂)하고 선도(善導)하게 되므로 도의국가(道義國家)의 성과라 할 것이다. 이를 가리켜 옛날 군주시대는 왕도정치(王道政治)라 했고 오늘날의 현시대는 진정(眞正)한 민주정치(民主政治)라한다. 

(이하 생략)


 종교는 세간과 출세간 사이에 서 있다. 둘이 아니라고 하지만 조화를 이루기가 간단치 않다. 

 불교의 이미지는 출세간적이다. 많은 이들에게 불교는, 속세에서 벗어나 마음을 쉬게 하는 종교로 각인되어 있다. 출가수행을 권하고 많은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세간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벗어나 홀로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세간에서 추구하는 욕망을 끊고 번뇌 망상을 여의고자 하기에 출세간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중생구제와 불국정토라고 하는 궁극의 목표로 본다면 더더욱 세간을 떠날 수 없다. 

 세상에서 벗어나 은둔한다면 고립된다. 현실의 문제에 답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교는 외면당한다. 반대로 지나치게 밀착하면 지탄을 받기 쉽다. 현실정치에 치우쳐 타락하거나 손가락질받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종교가 세상과 접하는 지점은 진리에 있다. 종교의 역할은 진리로써 바른 길을 제시하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물질문명의 발전을 공유하고 활용하되 그 이면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어주어야 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회문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원정 대성사는 물질적 욕망에 내달리는 빈곤한 정신을 불교로써 정화해야 하며, 도의를 바로 세워 진정한 민주주의를 구가할 수 있도록 인도하라 했다. 지혜로써 자각하고 계행으로써 자제하여 진정한 자유를 누리라 했다. 욕망으로 치닫는 물질문명의 폐해를 멈추는 브레이크가 되고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죽비가 되어 상호 보완하면서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도록 길이 되고 의지처가 되어야 하는 종교가 언제부터인가 등불이 되기는커녕 도덕성에서조차 지탄을 받게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속의 욕망이 괴로움의 근원이자 지극히 헛되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는 것이 출리심이다. 많은 이들이 추구하는 세속적인 가치가 한낱 물거품이라는 것을 알고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 출세간이란, 자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갈애와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관계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문제로 이어진다. 수행과 변화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각성하고 먼저 나서야 한다. 하지만 나만 깨닫겠다거나 내가 먼저 깨닫겠다는 생각에 머문다면 또 다른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나도 괴롭고 남도 힘들기에 문제의 근원을 찾고 해결의 방법을 찾아 영원히 행복한 길로 다 같이 나아가겠다고 할 때 수행은 힘이 생긴다. 

   내면의 자각과 자기 수행이 없는 중생구제는 표피적이거나 일시적이기 쉽다. 자칫 잘못하면 시혜를 베푼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또 다른 우월감과 자기과시에 빠질 수 있다. 이타행이 없는 수행은 현실도피가 되기 쉽다. 가만히 앉아있는 순간에는 시끄러운 생각도 가라앉는 것 같고 욕심과 분노도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람을 만나고 상황을 대하면 진실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경계를 만나서 여여하고 순일할 때 진정한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물 긷고 나무하는 일상이 묘한 도리라고 했다. 그렇게 매 순간 깨어있고 맑아질 때라야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잠잘 수 있는 진정한 자유로움이 발현되리라 생각한다. 해인사 법보전 주련에 있는 말씀과 같이, 진정한 깨달음을 이루는 원각도량은 생사가 일어나고 있는 바로 지금 이곳이다. 현재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삶의 현장에서 올바른 역할을 할 때 불교와 불교인은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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