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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암혜장과 귀류논증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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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0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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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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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2-09 14:12 조회 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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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암혜장과 귀류논증의 견해

가끔 논문이나 학회에 등장하는 ‘선밀쌍수(禪密雙修)’의 화제는 밀교 전공자로서 아예 논란이 없는 것보다는 반가운 일이다. 여러 논객들의 논쟁에 언뜻 엿들은 것은 조선시대는 선밀쌍수가 아니라 ‘선주밀종(禪主密從)’이라 말해야 옳다는 말도 들었다. 즉,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불교는 선(禪)이 중심이고 밀교는 그 주변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전 신라와 고려시대 불교를 살펴보면 신라말 선이 들어온 이래 ‘밀주선종(密主禪從)’이라는 말은 확실히 가능하다. 그러나 선(禪)의 범위를 살펴보면 초기불교의 수식관·사념처로부터 시작해 37조도품과 대승불교 유가유식에 이르는 것이어서, 논쟁 이전에 선의 범위를 두고 견해를 좁혀야 겨우 대화가 시작될 것이다. 


확실한 것은 ‘선교일치(禪敎一致)’와 같은 말을 쓸 때면 간화선이나 더 좁히면 임제선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야 맞다. 의상(義湘)대사께서 남기신 <법성게(法性偈)>에는 다라니라는 말이 나온다. 다라니는 불교 이론을 심지(心地)에 새기는 문사수혜(聞思修慧)의 유가행 가운데 하나이다. 때문에 다라니는 기억을 의미하는 총지(總持)라 번역하며, 다라니도 넓은 의미에서는 선(禪)에 속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다라니는 진언과 함께 밀교에 속한다. 요약하면 선밀쌍수라는 말의 기원은 높이 거슬러 올라가면 의상대사의 법성게에서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론을 논하면 선밀쌍수의 경우 ‘선주밀종’보다 더 유용한 말은 ‘선체밀용(禪體密用)’이다. 즉, ‘선은 체(體)이고 밀은 용(用)’이라는 말이다. 선사들의 견성오도의 경지에서 세간에 인격을 보일라치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으로 진언이나 다라니만큼 유용한 것도 없으며 그 역사는 무척이나 오래되었다. 


한편 불신론(佛身論)으로 따지면 견성오도는 열반법신에 계합하여 문자나 그림의 터럭을 용납하지 않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법신에 따라다니는 보신과 화신은 어찌할 것인가? 견해가 옹졸하면 선문의 입장에서 장엄한 화장세계의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두타행도 부담스러울 것이다. 선사들은 체용(體用)의 순역(順逆)에 걸림이 없어야 한다. 세간혜에 순응해야 중생을 구제하고 보현행원의 원력도 길을 찾을 것이다. 선이 아닌 밀교의 경우 ‘선밀쌍수’ 화두의 단서는 불신과 귀류논증의 중도이다. 


밀교의 유가행은 오지오불을 말하는데 오지로서는 법계체성지·대원경지·평등성지·묘관찰지·성소작지이며, 오불로서는 비로자나불·아촉불·보생불·아미타불·불공성취불이다. 체용론으로 말하면 체는 비로자나불이고, 상은 아촉불로부터 아미타불이고, 용은 불공성취불이다. 오불 가운데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를 구족하는 것이다. 오지오불에 대한 자세한 이론을 여기서 다할 수 없지만 무수한 현상계를 두고 적멸오도의 경지를 따로 구한다면 그것은 한참 길을 벗어난 것이다. 붓다가 설하신 것으로 그 중심은 연기의 도리에 있다는 말은 무수히 들었을 것이다. 


연기이기 때문에 불멸의 고유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조작된 것은 부정하기에 연기를 깨닫는 자는 구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 무상한 현상계가 진리 법신이라 말하지만 진리법신이란 언명(言名)마저 세울 수도 없고 불성이란 말도 다 거짓이다. 진리라는 언명을 가정하는 것은 자립논증의 방식이지만 언명마저 부정해야 귀류논증의 참된 이치이며 이것이 중도의 참된 풍도이다. 개인적으로 흠모하는 조선시대 선객으로 오래전 소개한 아암혜장(兒庵惠藏, 1772-1811) 선사가 있다. 정약용과 친분이 있던 선사는 술을 좋아해 40세 일찍 입적하셨지만 ????아암유집????을 보면 선사야말로 선밀에 소통하는 지극한 경지를 보여 주는 선철(禪哲)이시다. ????아암유집???? 권2에는 「두륜산만일암중건상량문????에는, 


“대들보 위쪽에는

숱한 별들 찬란하고

단아한 광명을 토하니

티끌 품은 바람 시원하네.

대들보 아래에는

붉은 샘 깊고

인간계 흘러내려

비옥한 들 적시네”


지면이 적어 동서남북을 다 싣지 못하지만 체용이 구족하고 자수용신과 타수용신의 지극한 도리가 완연하지 않음이 없다. 같은 책 <대둔사비각다례축문>에 아함선사는, “사명대사에 이르러 삭발에 수염을 남겨 장부의 표상을 버리지 않고 위태함을 지고 험지를 다녀 보살의 풍도를 전하였다”(ABC, H0243 v10, p.697b24)라고 하였다. 「화악대사비명」에는 월저(月渚, 1638~1715) 선사가 화악선사를 가리켜, ““내가 남쪽 지방에 갔다가 육신보살을 친견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아암선사가 남긴 글들은 임제풍이 완연한 시대 보현행원 서원이 활발발한 선사들을 무수히 인용하였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어찌 대승불교가 기울었다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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