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우리의 본분이자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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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0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함께 읽는 종조법설집페이지 정보
필자명 윤금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작가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2-09 12:25 조회 47회본문
제1장 교상과 사상 편
제3절 각종논설(各種論說)
1. 두 개의 생명(生命)과 수행(修行)
불(佛)과 인간과 동물, 이 가운데 인간은 불성(佛性)과 동물성(動物性)이 합쳐서 된 것이 인간의 특징(特徵)이다. 여기에서 성불(成佛)도 할 수 있고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질 가능성도 있는 분기점(分岐點)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과 각오(覺悟)의 필요성도 비롯되는 것이다. 끝까지 신비(神秘)하고 오묘(奧妙)하기만한 인간생명의 무한가치(無限價値)를 탐구(探究)하는 고귀(高貴)한 노력과 먹고 자는 공간확보(空間確保)와 물량확보(物量確保)를 위해 펼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역사(歷史)가 뒤섞여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의 흐름이 있고 보다 발전적(發展的)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역사다. 개인의 삶을 이어가는 목적이 집단적(集團的)으로 엮어가는 사실이 역사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여래(如來)처럼 거룩할 수도 있고 개나 돼지처럼 추악(醜惡)할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두 개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신비(神秘)하고 오묘(奧妙)한 영원한 생명이요, 또 하나는 동물적인 육체적인 생명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전자(前者)는 모르고 후자(後者)만 알기 때문에 진실한 생명이 매일(每日)매일 손상(損傷)을 입고 동물적으로 범죄(犯罪)만 하게된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인 제일의 생명과 육체적인 제이의 생명, 이 가운데 어느 것을 우리는 아껴서 할 것인가.
인간의 지혜는 경험을 통해 얻어진다. 그래서 현명(賢明)한 사람은 그만큼 그의 생애(生涯)에서 시행착오(施行錯誤)를 많이 경험한 사람일 수도 있다. 우리의 신앙(信仰)도 종교적인 경험을 통해서 확고(確固)해진다. 허다한 난간(難艱)과 시련(試鍊)을 거쳐서 진리를 체득(體得)한다. 인간이 행복해지면 오욕(五欲)만 높아질 뿐이지 진리(眞理)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오욕을 떠나서 고행을 하는 것이다. 진리는 무궁하고 수행은 무한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미완성(未完成)으로 죽는 것이다. 현실적(現實的)인 면이나 진리적인 면이나 모두 미완성으로......
동물적인 인간을 다루기 위해서는 범율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함께 만든, 즉 나쁜 일은 모두 하지 말자는 사회적인 공동계약서(共同契約書)다. 그러나 이 계약을 위반(違反)하는 자가 많다. 그러나 진실한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자는 법률이 없어도 관계없이 스스로의 규범(規範)을 정하여 자제(自制)하며 수행한다. 이것이 곧 정계바라밀(淨戒波羅蜜)인 것이다. 동시에 영원한 생명의 원천(源泉)인 것이다.
한창 꿈 많고 희망이 넘쳤던 20대에는 세상이 모두 고통이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궁극의 목표가 육도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나고 죽는 일이 없는 열반이라는 말씀에 공감하지 못했다. 삼악도는 당연히 가고 싶지 않고 가는 일도 없을 것이라 믿었고, 지금 사는 인간 세상은 살만하다 싶었다.
그때는 괴로운 일보다는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유복하지 않았지만 크게 불행하다 느끼지 않았고 가진 재주가 별로 없어도 그다지 불안하지 않았다. 3~40대로 넘어가면서 인생의 쓴맛을 보기 시작했다. 내 뜻과 무관하게, 나의 노력이 무색하게, 인생의 파도 앞에서 속절없이 허우적댔다. 일체개고이고 인내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바세계라는 말씀이 피부로 와 닿았다.
물론 부처님께서 삼법인과 사성제에서 고를 강조한 것은 즐거움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괴로움이 아니라 해탈·열반이라고 하는 영원한 행복에 대비되는 개념이겠지만 그냥 두루두루 괴롭고 힘들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인생의 후반부를 넘어 끄트머리를 향해 내달리는 나이 앞에 서니 인간 세상은 고와 락이 엎치락뒤치락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사실을 알겠다. 양적으로 반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손바닥의 앞뒤처럼, 빛과 그림자처럼, 양면적이라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궁극의 행복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즐거움이라 여기는 것들이 괴로움의 이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식을 낳고 기르며 기쁜 일도 많지만 그만큼 고되고 아픈 일들이 있게 마련이고, 가지면 갖는 만큼 오르면 오르는 만큼 시달리는 일도 따른다. 괴로움 역시 그렇다. 난관과 역경이 성장과 도약의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어려운 이웃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아량을 길러주기도 한다. 항상 좋은 것도 없고 늘 나쁜 것도 없다. 좋고 나쁜 것은 수시로 뒤바뀌게 마련이다. 행운의 신 공덕천과 불행의 신 흑암천은 언제나 함께 찾아오는 손님이다.
고민이 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보는 콘텐츠 가운데 하나가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다.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비슷한 상담 제목을 골라 보면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주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을 때는 오히려 보기가 꺼려진다. 너무나도 직설적인 스님의 솔루션을 감당할 힘이 없어 그런 것 같다. 절망에 깊이 빠져있을 때는 모든 것이 무섭고 아프다. 도저히 희망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괴로움에 허덕일 때는 수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게 마련이다.
곤궁하고 심란할 때 취재차 한 사찰에 가게 되었다. 부처님의 원음 그대로 공부하고 실천하는 여법한 수행도량이었다. 신도들을 인터뷰하니 하나같이 신심과 환희심이 넘쳤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공부하는 기쁨을 쏟아내며 더 늦기 전에 마음공부를 서둘러야 한다고 했다. 존경스러웠다. 사는 게 여유로워 이렇게 먼 곳까지 공부하러 다니고 며칠씩 척척 집중수행을 하는 게 내심 부러웠다. 솔직히 좀 속상하고 샘도 났다.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틈이 생기고부터 매월 다라니 108독 기도법회에 동참한 적이 있다. 가슴이 벅차다고 할 정도로 행복했다. 중간 중간 몸도 아프고 속 시끄러운 일도 많았지만 이겨내며 수행하려 애쓰는 스스로가 대견했다. 세상의 풍파가 그 정도에서 잦아 든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내내 기쁜 마음으로 다녔지만 사정이 생겨 지금은 잠시 중단했다.
반대로 걱정거리 하나 없는 이들이라면 굳이 종교를 가까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이 차츰 종교에서 멀어지는 것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성에 기인하는 면도 있겠지만 굶주림과 재해에서 많은 부분 벗어나 먹고 마시고 즐길 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이 많아 천상에 난 이들은 너무나 안락해 수행할 마음을 내지 못한다고 한다. 전생에 지은 복이 다하면 다시 윤회를 해야 하는데 천상에서 복을 누리느라 새로운 복을 짓지 못했으니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다.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는 고통이 극심하고 하루하루 생존에 허덕이느라 복을 짓기는 커녕 수행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삼선도의 하나인 수라 세상은 화내고 싸우느라 자신을 살필 시간이 없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있을 때 공덕을 쌓고 성불인연을 맺으라 했으리라.
우리의 삶이란 외나무다리를 걷는 것처럼 위태롭다. 자칫 잘못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삼악도에 떨어지기 십상이다. 서로를 짓밟고 괴롭히는 건 지옥 못지않고, 더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경쟁하는 건 아귀다툼 그 자체이다. 첨단의 과학기술과 기계문명을 자랑하지만 그만큼 지혜롭고 성숙한지 자신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매달리고 집착할 땐 나이고 학식이고 소용없이 어리석게 군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곱고 바른 마음자리를 가꾸고 키워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타락하는 건 금방이다.
대성사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지금, 성불도 할 수 있고 삼악도에 떨어질 수도 있는 분기점에 서 있다. 인간의 몸을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난다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눈 먼 거북이가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나고, 광활한 대지에서 실오라기 하나가 바늘귀에 꽂히는 정도로 희유한 일이다. 이생에서 진리와 멀어지면 만겁에도 만나기 어려우니 정신 바짝 차릴 일이다. 다음 생을 생각하면 수행은 우리의 본분이자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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