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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불교 대중지 월간 <불교>의 풍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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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12-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법장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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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전 동국대학교 티벳대장경역경원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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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2-05 12:23 조회 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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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불교 대중지 월간 <불교>의 풍운

일제 강점기 불교계를 이끌었던 <불교>(1924-1944)는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이 발행한 월간 불교 잡지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사찰령에 의하여 전국사찰을 30본 말사의 형태로 재편하였고 30본산 주지들은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을 만들고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1920년대 초 일시 폐간되었다가, 1924년 다시 통합하여 불교포교와 본산 간의 소식을 공유하기 위해 월간 <불교(佛敎)>를 창간하였다. <불교>는 종교시사를 다룬 논설, 불교개혁론, 경전번역, 전통문화, 불교 문학 작품 등 다양한 장르의 글들이 총망라되어 있어 근대 한민족의 불교 동향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한다. 

발행 책임자를 보면 창간호부터 83호까지는 권상로가 맡았고, 84 · 85합호 이후부터 종간호까지 한용운(韓龍雲)이 맡았으니 당대의 지식인이 <불교>를 이끌었다 할 수 있다. <불교>지는 일본의 개방에 따른 불교학 연구의 현대화 종향을 일찍이 수입하여 대중지임에도 불구하고 빨리어·산스끄리뜨어를 도입하는 등 전문적이며 깊이 있는 불교학을 소개했다. <불교> 제18호(1925.11) 기사에는 동아불교대회(東亞佛敎大會) 기사를 보면 세계의 불교학자들이 모여 현대 학술대회 못지않은 연구발표가 소개되었고, 대장경 연구와 관련해 산스끄리뜨 패엽장경을 시작으로 빨리, 한글·한문, 티벳, 몽골, 만주장경뿐만 아니라 서하어, 돌궐어, 구자어, 우디야나 장경, 니할리어 등 희귀 대장경 연구마저 이루어졌다. 또한 밀교와 관련해 실담집, 진언다라니집, 불교만다라도 그 연구성과가 소개되었으니, 당시 조선불교의 인사들과 대중으로 하여금 현대학문으로서 불교와 세계불교의 눈을 뜨게 한 것에 <불교>지가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   <불교>지 제14호(1925.8) 기사를 보면 불교수행이 동서남북 각기 문이 다르지만 들어가고 나면 한 장소에 모이는 것처럼 구경처에 성불에 이르는 것은 다 같다고 하였고, 이어 종파의 수행문을 열거하였는데 소승에 수관행(修觀行), 선종에 좌선, 천태종에 지관, 현수종(賢首宗), 즉 화엄종에는 법계관·법상종에 유식관, 정토종에 십육관이 있다 하였으며, 마지막 밀종(密宗)에는 아자관(阿字觀)이 있다 하였다. 권상로는 밀종를 밀교종파의 줄인 말로 파악하였으며, 적어도 밀교수행으로서 아자관의 면목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불교수행을 이관(理觀)과 사수(事修)로 나눈 것인데 이관이 불교종파의 전문수행을 가리킨다면 사수는 신어의 삼업을 불법에 계합하는 수행이니 현실 속에서 오의를 궁구하거나 여법하게 살아보려는 생활불교의 지침이 일제강점기에 존재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불교> 제54호(1929.12)의 아자관과 관련한 다른 기사를 소개하면, “[불교는] 일자일구(一字一句)라도 그 묘한 이치를 드러내는 것이니 그것은 경전의 제목만으로 불교의 요점을 알 수 있으며 부처의 명호에도 족히 대요를 갖추며, 아자본불생(阿字本不生)의 아자(阿字) 일자에도 갖추어져 있다하고, 선종에서는 한 침묵으로도 역시 얻어 죽고사는데 자재하고 주고 빼앗는 것에 종횡무진한다”라고 하였다. 일자에 미묘한 이취에 계합하는 뜻에서 밀교와 선이 다르지 않은 선밀불이(禪密不二)의 이치를 논함은 지금보다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한다. 

<불교> 제4(1924. 10)호에는 이능화(李能和, 1869-1943)가 기고한 글에서 조선과 일본의 대장경 외교를 다룬 <고려판대장경과 일본의 청구(請求)>라는 글을 볼 수 있는데, 기사의 내용은 조선조정이 들어선 이후 일본에서는 중종대까지 줄기차게 대장경을 요구한 사실과 숭유억불 정책으로 대장경을 쉽게 내주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조선왕들은 대장경을 주지 않기 위해 갖은 핑계를 대어 거절했다는 내용이다. 세종대의 경우 당시 일본 사승(使僧) 게이시(圭籌梵齡)는 단식까지 하며 결사 요청하였고, 이 와중에 범자대장경판과 밀교대장경판이 대신 일본에 보내지게 된 사실을 조선왕조실록 원문과 함께 게재하였다. 무능거사는 게이시가 무엇이 조선불교의 보물인지 훤히 알고 있었으며, 대마도 성주와 짜고 만약 대장경판을 받지 못할 경우 조선을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을 세종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여 압력을 넣은 사실을 거론하였다. <불교>지는 일본 정부에 휘둘린 사찰연합체의 기관지였지만, 대장경과 관련한 간접기사에서 일제에 저항했던 당시 불교계 지식인들의 저항과 배짱을 엿볼 수 있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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