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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 대성사 밀교사관 계승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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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8-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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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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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0-15 11:53 조회 6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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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원정 대성사 밀교사관 계승과 과제 (1회)

원정 대성사 밀교사관 계승과 과제

2024 한국밀교학회 춘계 학술대회에서 전 티벳대장경역경원 정성준 박사가 <원정 대성사 밀교사관의 계승과 과제>의 주제로 불교총지종 종조에 관한 논문을 학계 최초로 발표해 귀추가 주목됐다. 또 이 논문은 그 가치와 학술적 지위를 인정받아 한국밀교학회 학회지에 등재되기로 결정됐다. 이에 본지에서는 논문을 총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Ⅰ. 서언

Ⅱ. 행장과 창종 이념

  1. 행장의 요약과 활동기 구분

  2. 창종 배경과 이념

Ⅲ. 밀교사관과 교판사상

  1. 소의경전과 교판사상

  2. 역사관과 준제진언 

Ⅳ. 원정사상의 계승과 과제

  1. 밀교사관의 계승과 발전 

  2. 자주정신과 의궤 전승

Ⅴ. 결어



Ⅰ. 서언

한국불교사를 통해 볼 때 밀교는 일찍이 한국 불교문화의 한축을 형성할 만큼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밀교는 화엄·천태·선·정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여하였으며,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문화의 음악과 가사, 건축, 미술, 의식, 민속 등 전반에도 영향을 끼쳤다. 한국 밀교는 고려시대 신인종(神印宗)과 지념업(持念業)의 종단을 형성하였으며 조선초 태종의 종단 통폐합 조치 이후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도 많은 밀교 전적이 간행되었고 적지 않은 밀교도량이 개설되었으며 범패와 실담에 능했던 승려들이 있었다. 

1810년 총지사(摠持寺)

를 마지막으로 밀교를 유지한 흔적은 사라졌지만 용성(龍城)의 육자진언과 성철(性徹)의 아비라기도를 비롯해 대부분의 사찰의식은 밀교에서 온 것이며, 한국전쟁 후 참회원(懺悔院)을 시작으로 진각종(眞覺宗)과 총지종(總持宗)의 양대 종단이 형성되었다. 

 한국불교학계는 신라·고려·조선조의 종단이나 종파 연구뿐만 아니라 현대교종단의 종지와 현황 연구도 볼 수 있지만 불교총지종(이하 총지종)의 경우 종단의 규모와 활동을 고려할 때 그 연구가 다소 늦은 점이 있다. 

본 논문은 불교총지종 연구의 일환으로 한국밀교의 중흥조이자 창종주인 원정대성사(元淨大聖師)의 밀교사관과 교판사상의 일부를 살펴본 것이다. 대성사는 1972년 불교총지종을 창종하였으며 대한불교 진각종(眞覺宗)의 회당대종사와 함께 현대 한국 밀교를 이끌었다. 본 연구에서는 현행자료를 중심으로 어록과 소의경전에 나타난 대성사의 밀교사관과 교판사상의 일부를 살펴보고 문제가 될 가능한 연구 주제를 제기하려 노력하였다.  

불교사에 자취를 남긴 한 인물의 연구는 충분한 자취의 수집이 절실하다. 학문적 견지에서 아주 사소한 자료라도 매우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성사의 행장은 회당대종사와 진각종에서의 활동을 공유하지만 이와 관련한 연구는 더 식견 있는 학자들의 소임이 될 것이다. 한 종단과 인물 연구는 역사와 종지, 소의경전과 사상, 수행과 의식 등 많은 연구 주제가 가능하다. 보다 심도 있는 연구는 종단 차원의 기획에 의한 전문연구집의 발간으로 가능할 것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승달산(僧達山)에 있었던 남북국시대 금지국의 승려 정명이 창건한 사찰. 신라 성덕왕 때 서역 금지국(金地國)에서 온 정명(淨明)이 승달산의 지맥인 백운산(白雲山)에 창건하였으며, 신라 말에는 혜통(惠通)이 이곳에서 수도하였다. 1016년(현종 7) 화재로 인하여 절이 소실되자 백운산 밑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하였는데, 사찰의 정교함은 호남지방에서 으뜸이었다고 한다. 당시 총지마을일대는 모두가 총지사의 사역으로서 승려의 수가 800명, 암자는 9개소, 승방은 200동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은 1810년(순조 10)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다. 당시에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수(林勉洙)는 총지사 뒤에 아버지의 묘를 썼는데, 승려들이 이에 반대하여 묘에 참나무 말뚝을 박아버렸다. 임면수는 즉시 사찰의 철거를 명하였으나 승려들이 이에 불응하자 절에 불을 질러 폐사로 만들었는데, 승려들의 일부는 분신(焚身)하고 일부는 법천사(法泉寺)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당시까지 이 절은 장성 이남에서 출가하는 사람들의 도승지(度僧地)였다고 하며, 많은 도승(道僧)들이 배출되었다[<총지사(摠持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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