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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하는 이는 재앙을 스승으로 삼는 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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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5-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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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5-03 13:57 조회 2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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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 대성사 일대기 (31회)

“수행하는 이는 재앙을 스승으로 삼는 법이니”

1970년 10월 10일부터 15일까지 한국에서 개최된 세계불교종단대표컨퍼런스에 한일불교친선협회 부회장, 대한불교 진각종 대종사 자격으로 대회 부단장으로 참여하며, 밀교 종단의 위상을 높였다.


세상에 순응하는 자는 진실을 덮어야 하는 경우가 오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돌아가는 일이 있다. 그러나 스스로 밀교 행자이며 관세음보살의 뜻으로 일체를 구하겠다는 원을 세운 이는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실 앞에 두려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성사는 준제관음법을 펼치면서 자신 앞에 놓인 세상의 오해와 장애를 알고 있었다. 허나 자신의 뜻을 굽힘으로써 세상을 무명으로 이끈다면 그 또한 밀교행자의 길이 아님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대성사는 1971년 이의 시행을 진각종 원의회와 종의회에 제안하였고,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불명확하고 불합리한 의궤를 보완해야 한다는 데 대다수의 승직자와 교도들이 공감했지만 당장 준제관음법의 취지를 의심하는 일이 벌어졌다. 회당 대종사 재세 시 시행했던 수행법을 절대 바꿀 수 없다는 반대 입장이 대두되면서 종단은 흔들렸다. 정해진 것은 바꿀 수 없으며, 새로움을 내세워 옛 자취를 지우려 한다는 주장과 곡해가 빗발쳤다. 오해의 뿌리에는 대성사가 회당 대종사의 흔적을 지우고 종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 한다는 의심이 있었다. 회당 대종사의 권속을 중심으로 일부 스승들의 항의가 닥쳤다. 소위 준제파동이다.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분종의 조짐마저 보였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원정 대성사는 20여 년간 회당 대종사와 함께 심혈을 기울여온 종단의 앞날을 먼저 생각했다. 분열을 원치 않았던 대성사는 1971년 12월 총인 직을 비롯한 모든 직책에서 스스로 물러났다. 회당 대종사의 영전에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대성사를 따르던 이들의 동요와 분란을 막기 위해 아예 종적을 감추고 칩거에 들어갔다. 


대성사의 대처는 오직 묵연(默然). 어떤 경우에도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심중을 지킬 뿐이었다. 그 과정을 많은 이들이 보았고 여러 스승이 목격했다. 후일 대성사를 따라 나선 이들은 이때 묵빈대처(默賓對處)하는 모습에서 진실의 모습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움직이거나 대항하지 않고 오직 불경을 연구하고 밀교행자로서 진언과 수행에만 몰입했다. 


바른 밀교수행법을 정립하여 진각종을 정통 밀교종단으로 한 단계 도약시키려던 대성사의 뜻은 무산되었다. 정법 밀교에 대한 무지와 종단을 혼란에 빠트릴지 모른다는 오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생을 걸고 실천했던 중생구제의 대원력을 여기에서 멈출 수는 없었다. 옴마니반메훔으로 불철주야 기도해 생사가 위태로웠던 아들을 구했고, 법신 부처님의 신묘하고 불가사의한 가지력加持力을 생생하게 확인한 대성사는 진언염송의 가피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체득하고, 수많은 밀교 경전 속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아나갔다. 


잊혀졌던 비밀의궤법과 다라니의 밀교수행법을 이대로 묻어야 하는가? 정통 밀교종단을 이 땅에서 구현하는 것은 정녕 헛된 열망인가? 대성사는 곧 100일 불공에 들어갔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믿음을 법계에 맡기기로 했다.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거소에 은거하며 심중의 응답을 기다렸다. 기도와 수행이 깊어졌다. 주변이 고요해졌고 시비는 사그라들었다. 오직 정진만이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본래 존재하는 법신 부처님을 마음 안에 온전히 담기 위해 염송했다. 민생고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는 참된 밀교수행법을 다시 확증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쳤다. 나라와 민족을 구하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과 해탈을 얻는 진리의 방편을 체득하고자 온몸을 던졌다.


정진이 이어졌다. 두 손으로 맺은 결인은 우주 법계의 법신 부처님과 자비의 화현 관세음보살님, 그리고 간절한 진언행자를 하나로 이어주었다. 지극한 진언염송이 거듭되었다. 우주의 소리와 고통 받는 중생들의 소망이 소용돌이쳤다. 진언염송의 뜨거운 염원과 정통·정법의 밀교종단 창종을 위한 서원이 대성사의 몸과 마음을 채웠다. 


그리고 백 일째 되는 4월 7일 밤, 원정 대성사는 백발의 노인으로부터 금관을 전해 받고, 다음날 밤 다시 백발의 노인으로부터 한 줄기 서광과 함께 “대승장엄보왕경과 준제관음법으로 교화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한 점 티 없이 바르고 깨끗하고 완전무결한 밀교법으로 중생을 고난에서 구하라는 불보살님의 부촉이었다. 대성사는 이를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 심지를 세웠다. 밀교의 법은 몽수 전법된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한 것이다. 


1972년 6월 28일 대성사는 마지막 남은 명예직인 기로원장 직을 내려놓고 물러섰다. 신심 있는 이는 오직 사필귀정과 파사현정을 믿을 뿐 세상의 오해와 시비에 휩쓸리지 않아 용기 있게 자기 길을 걷는다. 대성사는 그렇게 자기 삶의 중요한 시간을 보낸 진각종에서 물러서 더 큰 빛의 길로 향하였다. 


당장 진각종에서 거처를 옮겨야 했는데, 대성사로서는 갈 곳이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인척의 집에 임시 거처를 구하였다. 당시 형수와 가족들이 정릉에서 목욕탕을 하였는데, 1층은 목욕탕이고 3층에 그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비어 있던 2층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였다. 대략 3개월 정도를 정릉 형수의 집에 의탁해 있었다. 그야말로 평생 사사로이 가지고 쌓아둔 것이 없는 구도자의 삶이었다.


그 후 서울 중랑구 상봉동 상봉역 앞 서울선교부 응신서원당(應身誓願堂), 지금의 정심사에서 대성사는 수행을 하며 칩거하게 된다. 이곳에 머물면서 법계의 변화를 살폈다. 1972년 8월 27일부터 이곳에 머물며 밀교의 후일을 기약하였으니 정심사는 총지종의 요람이 된 곳이다.


대성사는 세상과 절연한 채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는데, 상봉동에 머문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스승과 교도들이 줄을 이어 찾아왔다. 이때 대성사를 찾아온 이들이 록정, 환당, 청암, 현수, 불멸심, 법장화, 대자행, 복지화 등 진각종의 스승과 교도이다. 오래도록 대성사를 보아온 이들은 한눈에 밀교의 비법을 성취한 거룩하고 고요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성사의 편을 들기도 하고 종단의 처사를 원망하기도 하였으나 대성사는 고요히 웃을 뿐 일체 원한을 삼지 말라고 가르쳤다. 


“세상일은 무상하니 생한 것은 멸하고, 나타난 것은 변하는 법이다. 인연이 다하면 새로운 인연이 생기고, 전법은 멸하고 후법은 생기는 것이 불법의 요체이다. 너무 안타까워하지도 말고 마음에 미움을 담지도 말라. 법계는 어려움으로 복을 주고, 수행하는 이는 재앙을 스승으로 삼는 법이니 이 일이 후에 크게 좋은 길을 열어준다고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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