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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 귀의는 정신적 생명을 부처님께 맡긴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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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7-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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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7-11 13:20 조회 5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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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 대성사 일대기 (21회)

부처님께 귀의는 정신적 생명을 부처님께 맡긴다는 뜻이다

대성사는 수행 중 자신에게 닥칠 운명과 앞길을 예감하고 있었다.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지, 자신이 국가와 사회를 위해 그리고 세상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깊이 고심하고 있던 터였다. 그 깊은 마음의 심지에 대해 어느 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국가와 사회가 있어야 내가 생존하지 않는가. 한 쪽만이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구도 공전하면서 자전을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에게 목숨을 바쳐 귀의한다는 것은 이 정신적인 생명을 부처님에게 맡긴다는 뜻이다.”


처음 만남이지만 두 성인은 마음이 맞았다. 회당 대종사가 제안한 것은, 밀교 교법을 펼쳐 종단을 일으키는 데 자신은 바깥일을 도모할 테니 교리와 수행체계 그리고 교단을 정비하는 일 등 안 일은 대성사가 맡아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수행도 결국은 작은 나에게서 벗어나 대아를 성취하기 위함이니 자신의 안락을 구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번거로움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일었다. 결국 회당 대종사의 구함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또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고통 속에서도 일심을 잃지 않고 오직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불교를 공부한 본 면목인 것을 알았다. 대성사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어떻게 내려놓고 행할 것인가에 대해 이런 가르침을 남긴 바 있다. 


“나(我)란 자기 이익을 구하고 편안하길 바라 자기 명예, 자기 지위, 자기 의견을 세우게 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아의 속박을 받아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부처님께서는 나란 결코 불변의 실체가 아니란 것을 가르치셨다. 나에 집착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노여움과 욕망의 망념에 사로잡혀 고통을 받게 되고,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자유자재하여 해탈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나란 것에 집착하는 것은 중생이며, 나를 오직 멸하려고 수행하는 것은 소승小乘이다. 작은 굴레에 스스로 갇힌 소아에서 일체 중생을 위해 자기 굴레를 넘어선 대아로 나아가는 것이 곧 대승의 길이다. 그로부터 대아를 세워서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을 위해 이익 되게 하여 국가사회에 봉사하고 모든 일에 봉사하기 위해 자기를 닦아가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자 현세를 정화하겠다는 목적을 세워야 한다.”


새로운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이와 같은 뜻이 있어서였으며, 자신의 안락을 구하지 않고 위기와 고난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이 굳어졌다. 마음을 다해 수행하는 일도, 자신과 자식 걱정에서 벗어나 전쟁으로 고통 받는 모두를 위한 구제의 길을 세우겠다는 대아의 실천으로 나가게 된 것이다. 그 첫 만남은 한국 현대 밀교가 위대한 출발을 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한 억겁의 시간을 진리로 이끈 것이다. 


대성사는 당시 밀양농잠중학교의 행정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학교 행정업무를 맡은 교육 공무원이었는데, 이는 성품과도 잘 맞아 오래도록 해오던 일이었다. 남을 돕고 가르치며 공적 업무에 사사로운 감정을 개입하지 않는 자세는 직원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후일 총지종 스승의 상은 모두 대성사가 학교에서 학생을 대하면서 몸에 밴 것으로 실제적이고 절실한 모범이 됐다. 대성사가 후대에 당부한 스승의 사명은 실제로 당신이 학교에서 행한 사표 그대로이며, 진각종의 기틀을 잡을 때나 총지종으로 법을 펼 때 가장 중요한 지표로 강조했던 내용이다. 


“스승은 매일 따르는 교도들과 만나 그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가장 앞자리에 서 있으니 종단의 성쇠를 좌우한다. 그러므로 스승이 되면 세간의 즐겁고 괴로운 일에 이끌리지 말고 초연해야 할 것이다. 먼저 자신의 인생관을 바로 세우고 그 지표대로 생활하여 자신의 인격을 완성해야 한다.”


해방 전후 좌우익 충돌과 전쟁 속에서 자신은 아들의 실종이란 일을 겪었지만, 동요하지 않고 학생들을 대하고 학교 업무를 처리한 그대로이다. 대성사의 철저함은 가르침이 단순한 언어의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실행한 바를 전한 것이라 더 간절할 수밖에 없었다. 회당 대종사와의 만남을 통해 이 땅의 고난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구해야겠다는 발심을 크게 한 후 이제까지 자기 수행으로 살펴보던 경전과 불교 교리를 다른 눈으로 살피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불교의 교리와 수행관을 철저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막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믿음의 밭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찾아 탐구했다.


우선 밀교법에 관한 경전을 찾아 읽고 수행법을 살펴보았다. 당시에는 불교 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다. 특히 밀교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과 이해는 전혀 없던 때라 경전 구하기가 사막을 맨발로 걷기보다 어려웠다. 인맥을 통해 백방으로 책을 구했으니 일본어로 된 불교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대성사는 어학에 특별한 재능을 갖춘 터라 한문 경전과 일본어 책을 통해 밀교에 대한 대강의 얼개를 파악해 갔다. 한문과 중국어, 일본어, 영어, 러시아어까지 섭렵한지라 책만 있다면 어떤 언어로 된 것이건 읽을 수 있었다. 


누군가 책을 갖고 있거나 불교에 해박한 이가 있다면 그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고 배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돈과 정성을 모두 바쳐 밀교의 가르침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밀양 일대의 불교도들과 교류가 이어졌다. 비록 전쟁 통이지만 그들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책을 구해와 읽기도 하고 또 자신이 찾은 부처님 가르침을 그들에게도 이야기했다. 당시 진각종은 경북과 경남 지방에 막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한 사람의 교도와 한 스승의 원력이 간절할 때였기에 대성사가 오가며 사람을 모으고 불법을 이야기한 것은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밀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당시 참회원이란 이름으로 시작했던 교단은 전쟁 중에 심인불교 건국참회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곧 심인당으로 개명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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