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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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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1-07-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현묵의 세상읽기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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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9 07:47 조회 1,9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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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살자구요?

지난 해 어느 쯤인가부터 뭐 ‘느림의 미학’이라나 뭐 라나 하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말 자체가 멋있었다.

허겁지겁 달려가야 빈 쌀독이나마 채울 수 있는 이 살벌한 시대와 사회에 반기를 드는 말 같아서이다.

그리고 그 뒤에 ‘미학’이라고 붙이니까 어찌나 고급 스러워 보이는지, 더구나 그 ‘미학’의 제안자가 프랑스의 철학자라니, 없어도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래서인가, 요즘 유행처럼 이와 관련된 책도 수 종류가 나와 있다나 어쩐다나.

대체 그 내용을 알고 싶어 벼르다가 며칠 전 프랑스의 피에르 쌍소가 지었다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서 열심히 읽었다. 생소한 이름의 쌍소라는 저자의 글을 읽어본 소감은 한마디로 ‘뭐도 없는게 있는 척 하려는 수작’을 본 기분이다.

이 책을 낸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출간되자 마자 ‘논픽션’부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리면 그 나라의 지적 풍토를 대충 알만하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현대사회는 속도를 요구한다. 시간에 쫓겨 살아야한다. 하여 파스칼의 말처럼 고요한 방에 들어앉아 휴식 할 줄 모르는 데에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비롯된다. 따라서 느리게 사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한가로이 거닐고 고급스러운 권태에도 잠겨보고, 느긋하게 꿈을 감상하고, 포도주 한잔을 음미 하는 여유를 가져야 힌다. ’ 뭐 이런 내용 이다. 그래. 맞는 말이다. 사색을 할 줄 모르는 인생은 불행이다.

그런데 이런 ‘고급 스러운 권태’나 사색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배후세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한미디도 없다. 그저 허겁지겁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제 그 걸음을 늦추고 ‘한가로운 시간’을 가져보라고만 한다. 이 작자는 한술 더떠 그러면 신의 은총에 대해 감사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시면 떫지나 말아야지.

다른 얘기 한토막. 한 달포 전에 선배 한 분과 모처럼 인사동에서 곡차를 나눴다. 미술사학계에 널리 이름을 떨치는 분으로서 자주 자리를 하지는 못하지만 늘 서로의 근황에 대해서는 잘 알고 지내는 사이다.

이런저런 지난 얘기를 히다가 그 선배의 학교 동기 된다는 분에 대한 얘기까지 나왔다. 말에 따르면, 대학에서 함께 미술을 전공히던 친구는 졸업 후 자신의 전공을 뒷전으로 밀고 다른 일을 했다고 힌다.

아마 미술을 해서는 좀체 먹고살기가 힘든 세태인지라 진작에 다른 부문으로의 진출을 꾀했나보다. 그는 그 새로운 선택으로 지금은 여유 있는 중년을 향유하고 있다고 하였다.

어느 때이던가, 그 친구분은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네가 부러워. 지네는 전공을 살려 하고 싶은 일을 하여 왔고, 또 그 바닥에서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고 있으니 자네가 정말 부럽네. 나도 할 수만 있디면 지금 다시 예전의 내 전공을 살리고 싶거든. ”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고 한다.

뭐 그 친구분이라는 사람이 진짜 자신의 옛 전공에 대한 진한 의지가 있어 그런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는지 아니면 그저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에 그랬는지 그 진위는 잘 모르겠다.

종종 방송이나 신문, 혹은 잡지 따위에 간혹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예술이나 사회활동에 진출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니 자신의 전업과 함께 예술활동을 아예 겸업으로 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그러나 저러나, 전업이든 겸업이든 아니면 취미이든 간에, 또는 먹고살기가 넉넉하여 예술을 하든 나발을 불든 뭔 상관이랴.

한창 때 죽을둥 살둥 벌어 중년의 나이에 그 넉넉함 을 바탕으로 좀 고상하게 살겠다는데 뭔 시비할게 있겠나. 아니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겠다. 그것을 시비하는 건 뭔지 잘된 사람의 여유를 배앓이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래 배앓이라고 해도 좋다, 좀 솔직히 말해 이런 이들의 얘기는 너무 기름끼가 돈다. 빠르게 살아 온, 그래서 지금은 여유로운 중년이 되어 생각해보니 뭔가 허전하고 회의가들어 지난 청년 시절, 장래의 하 고자 했던 자신의 이상을 접은 보상으로 자신이 누리는호사에 구색을 갖추려고 하는 그심 보가 치사하게 느껴진다.

빗대자면 어느 방송에서 유명인들 이 생산현장의 인부와 함께 ‘고생’ 하는 ‘체험, 삶의 현장’을 보는 것과 똑같다. 그네들이 체험한 현장의 근로대중이 삶의 벼랑에 몰려 파업, 농성을 할 때 그 현장에서 체험했던 유명인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함을 조금이라도 느낄 ? 그렇게 부유한 중년에 들어서야 청년시절의 이상을 재현한다고 하여 그것이 무엇을 담아낼 수 있을까?

그들의 고상함을 깍아 내리자는게 아니라 그들이 성공을 추구하는 동안 우리 사회는 모순과 갈등이 더욱 고착화하였는데 혹여 그네들이 이것에 일조를 한 것은 이닌지 성찰을 하는게 더 바람직하지 않나 싶어서이다. 더 바란디면 그 성찰을 바탕으로 최소한 ‘시민운동’에 그들이 보시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이런 부류들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확대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그’들이다. 늘 쫓겨 사는 것 보다는 한 걸음 느리더라도 ‘긴 호흡’으로 사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가? 그러나 이것이 고작 개인의 여유로움에 그 친디면 호사에 불과하다.

느리게 살자고 권유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빨리 가도록 채찍질하는 세력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를, 그리하 여 참으로 인간이 개인의 영달에 쫓겨 살지 않고 인간을 인간답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의 해체를 위해 실천하는 ‘의지의 인간’이 되어야 힌다. 그때 진짜 ‘느림의 미학’이 미학으로서도 인정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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