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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청동대불 불사 논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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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1-07-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총지논단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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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9 07:22 조회 1,90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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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청동대불 불사 논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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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남진
(참여불교 재가연대 기획실장)

불교계 뿐 만이 아니라 주요 일간지와 방송에서까지 해인사 청동대불 불사를 둘러싸고 불거진 문제들에 대해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문제는 ‘지리산 살리기 국민행동 상임대표’이자 구참 선방 수좌인 수경 스 이 지난 20일「현대불교신문」에 기고한 ‘자웅. 성철의 죽음을 곡한다’는 제목으로 글에 대해, 해인사 선방에 안거 중이던 스님들이 선방을 이탈하여 집단으로 실상사에 찾아가 기물을 부수는 등 소동을 피운 것에서 일파만파 불거져 나온 것이다.

수경스님의 기고문 요지는 간단히다.

해인사는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을 세우 라는 것은 자운, 성철스님의 유지라고 하는데 두분 큰스님들의 생전 가르침으로 볼 때 속물주의의 상징인 세계 최대의 청동대불을 세우라고 하셨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더라도 ‘세상의 비판과 원성에 아랑곳하지 않고 큰스님의 유지에 따른 불사라는 명분과 논리로 불사를 진행하는 자들도 흙덩이를 좇는 어리석은 자들’이고, ‘사자는 토끼 새끼를 낳지 않는다’며 청동대불 불사를 추진하는 측을 ‘토끼’에 비유하여 비판한것이다.

수경 스님의 기고문은 즉각 ‘실상사 집단 소동’을 야기했다. 이에 대해 선각 스님 등 30명의 해인사 선방 수좌들이 실상사로 몰려가 수경 스님의 집기를 부수는 소동을 피웠다.

이어 선각 스님은 ‘일찍이 부처님는 말세에 악한 성품을 가진 비구가 나타나거든 침묵으로서 상대 말라고 당부했다’ 며 수경스님을 악성비구로 몰아 부쳤다.

그러자 실천불교전국승가회의 효림 스님이 ‘수좌들의 죽음을 곡하노라’ 글을 통해 공개적으로 ‘수경 스님의 글이 아무리 마음에 안들어도 해인사 수좌들이 폭력을 동원해서는 안됐다’며 ‘해인사 수좌들은 양아치 수준도 못된다’고 직설적으로 비난했다. 나아가 ‘수좌들이 스스로 한 행동인지 궁금히다며, (수좌들 의 행동은) 수처작주 하지 못한 모택동의 흥위병 같은 행동’으로 ‘전국의 수좌들을 해인사 수좌들이 다 죽였다’고 몰아세웠다.

여론은 수좌들의 폭력적인 집단소동에 대해 한결같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언론에서 연일 다루어지고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일이 왜 이렇게 크게 불거지고 있는지 생각해 볼 만한 일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열린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일부 출가승려들의 몽매적 행동의 습관적 반복으로 인한 것으로 보 다. 우리사회에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최  급격히 인터넷 등 정보통신 기술이 발전히면서 넓은 의미의 언론기능이 사회적으로는 대단히 강화되었다.

비록 그 익명성으로 인해 윤리적 책임 의식이 특별히 요구되기도 하지만 인터넷 이용자의 폭증은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주요한 집단에 대해 그리고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 즉각적이고 일상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밝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회의 주요한 집단에게 있어서 사회적 상식으로 비추어 볼 때 자신의 행동과 의사결정이 타당한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되었음 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번 사건은 이미 시민사회단체들이 대거 동참했던 가야산 골프장 반대운동과 우회도로 반대 운동 등을 통해 시민사회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해인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최소한 시민사회의 상식을 지키는 합리적 방법으로 여러 의제들을 다루어 가지 못했 던 해인사 출가 승려들의 독선적 자세 혹은 닫힌 마음이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독선적 자세 혹은 닫힌 마음이 토의적인 자세 혹은 열린 마음으로 변화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 이 출가 승려들의 자질부족과 무능력, 그로 인해서 생겨난 자신감의 부재와  신적 공허함일 수도 있다는 식자들의 탄식이 사실이라면 이는 도태의 시간만이 남은 것이다.

다음은 우리 속에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는 폭력문화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다. 폭력은 인내 있는 토의와 설득을 포 기하는 반불교적인 훼교행위이다.

언필칭 출가 승려사회 내의 미사여구로 이번과 같은 집단적 완력행사가 전통적으 로 있어온 ‘눈푸른 납자들의 결기’라고 주장히더라도, 이는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과는 조금의 인연 도 없을 뿐만 이니라 철저히 배척해야 할 행위이고 스스로를 천하게 만드는 행위였 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이다.

오히려 이런 폭력에 대한 비뚫어진 의식으로 인해 출가 승려들은 다중이 모이면 반드시 한바탕 해야한다는 마음을 형 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 폭력이 백주 대낮에, 몰염치하게 자행되어 왔던 것은 아닐까. 이런 폭력문화를 토론문화로 바꿔 가야 힌다.

부처님께서 교단을 길이 보전하기 위 해 ‘진리와 정의에 대해 자주 의논하라’고 가르치셨으니 이에 따르면 될 일이다.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되고 진리와 정의에 부합되는 것인지 고민하고 그것을 찾아 가는 과정 자체가 수행의 과정이다. 그 리고 이것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의 내적 자신감으로부터 우리를 사회에 활짝 열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 안에 모범 혹은 좌장으로 서 ‘어른’이 없는 시대를 사는 것 같은 느낌이다. 부처님의 과거 코삼비 비구들의 다툼 이후 공식화 한 ‘다툼을 해결하 기 위한 일곱가지 방법’에 보면 최후의 일곱 번 째 방법이 ‘'진흙을 덮어주는 짚’이다. 이는 모임에서 다툼의 양측을 대표할 수 있는 덕망높은 비구가 한 명 씩 선정되어 양쪽 의견을 주의 깊게 듣고 그들이 의견을 정히면 특별한 권위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치 짚이 진흙길을 덮어 옷을 더럽히지 않고 진흙을 건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해인사 문제를 보면 진흙을 덮  만한 어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후진들 스스로도 ‘특별한 권위’를 인정히려 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정하신 바와 같이 출가한 순서대로 앉는 법(위계질서)은 견고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사회가 여 을 일으켜 ‘약’을 주려고 하여도 좀처럼 ‘약’을‘ 먹지 않으려 하는 해인사 스님들을 보면 더욱 답답하기만 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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