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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와 번영의 땅 하얼빈에서 희망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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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9-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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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9-06 15:41 조회 76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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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원정대성사일대기 (11회)

기회와 번영의 땅 하얼빈에서 희망을 꿈꾸다

일본·유럽·소련의 사정 등 세계정세 이치에 밝아
지방법원 근무하며 어려운 사람들 송사를 돕기도


 하얼빈은 서양의 문물과 유럽의 패션이 가장 먼저 유입되는 번영과 기회의 땅이었다. 조선인들이 점점 증가하면서 1940년에는 조선인 중학교가 문을 열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면 봉천과 만주국 수도 신경까지 급행열차가 달렸다. 경성과 하얼빈은 직통 전화가 개통돼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동아일보 등 국내 신문사도 하얼빈에 지국을 개설하여 매일 새로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런 흐름을 타고 1940년대가 되자 조선 땅에 하얼빈 바람이 크게 불었다. 대중가요와 문학작품에 하얼빈이 무대로 자주 등장했다. 당시 신문과 잡지에는 하얼빈 기행 기사가 유행처럼 실렸다.
 가수 김선영은 ‘할빈 여수(旅愁)’라는 노래를 발표해 인기를 끌었고, 진방남은 ‘꽃마차’에서 “노래하자 하르빈 춤추는 하르빈”을 노래했다. 이난영은 1942년 ‘하르빈 차방(哈爾濱 茶房)’이란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했다.
 노랫말에서 하얼빈은 “푸른 꿈이 있는 희망의 땅”이라 그려지고 있다. 이런 가삿말처럼 하얼빈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큰 희망의 땅으로 다가왔다.
 하얼빈으로 가는 길은 대성사가 어린 나이에 걸어서 떠났던 망명길과는 달랐다. 단촐히 꾸린 짐과 함께 기차를 타고 경성역으로 가서 만주행 급행열차 ‘노조미’를 타고 개성-평양-신의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고, 만주국 수도 신경에 도착할 수 있다. 그곳에서 다시 특급열차 ‘아세아’로 갈아타고 목적지인 하얼빈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걸어서 몇 달이 걸렸던 옛길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일본말로 희망을 뜻하는 ‘노조미’와 ‘아세아’는 만주철도의 자랑거리였다. 당시 최고의 기술로 만들었던 특급 고속철도가 한반도에서 출발해 국경 도시 하얼빈까지 이어진 것이다. 가족을 이끌고 조국 땅을 떠나는 것은 마음 아픈 사건이었지만, 그 앞날에 희망이 있기를 바랐을 것이다.
 부부는 미지의 내일에 대한 설렘과 걱정으로, 어린 아들은 차창 밖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이 신기하여 지루할 틈 없이 하얼빈에 닿았다. 하얼빈은 추운 곳이다. 봄이 오는 듯싶으면 잠깐 여름이 스쳐가고 곧장 겨울이 시작되었다. 9월이 되면 도시는 석탄 때는 냄새와 연기로 뒤덮였다. 사람들은 자연히 외투 깃을 세워 바람을 피해 종종걸음으로 걸어야 했다. 밀양과는 전혀 다른 기후와 풍토, 낯선 문화가 있었다.
 대성사가 하얼빈에 자리를 잡고 얻은 일자리는 하얼빈 지방법원 소속 대서 업무. 관청에서 익힌 행정업무로 법원을 드나드는 사람들을 돕는 일이었다. 1940년 12월 18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 만주국에는 최고법원 아래로 5곳의 고등법원과 그에 딸린 25곳의 지방법원이 있었다. 그리고 하얼빈에는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이 함께 있어 법원 업무가 많았다. 사람들은 갖가지 송사에 시달려도 법에 대한 지식이 없어 손해를 입는 일이 잦았다. 그들을 대신해서 법원 서류를 쓰거나 간단한 법률 상담을 하는 일은 나름 보람도 있었고 수입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하얼빈의 중심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역이다. 작은 어촌 마을이 만주철도 종착역이 되면서 도시로 된 터라 역은 하얼빈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도시 옆을 흐르는 쑹화강(송화강, 松花江)엔 최신식 기관선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강가에는 붉은 돛을 단 홍선이 물고기며 생필품 등을 부지런히 싣고 하역하고 있었다. 시절의 사정을 제하고 본다면 한없이 평화롭고 활기차며 현대적인 도시가 하얼빈이었다.
 법원은 신시가지인 난강(南崗)지구에 있었다. 난강지구는 새로 조성된 신시가지였다. 새로 길을 낸 계획도시로 반듯반듯한 길이 바둑판처럼 나 있는 곳이다. 난강구에는 호텔과 병원을 비롯해 각종 관공서와 업무 관련 시설들이 들어서 있었다. 도심을 관통하는 완만한 언덕길 회하로(淮河路)가 송화강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그 길을 따라 최신 상품을 파는 백화점과 우체국, 은행과 함께 각종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었다. 하얼빈에서 난강지구는 가장 번화하고 화려하며 이국풍이다. 현재 하얼빈시 난강구 인민법원은 당시의 위치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법원은 회하로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군 교육 관계 업무로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경험은 법원 업무를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당시에는 글을 모르는 이들도 많았고, 이들은 행정관계나 법을 몰라 손해를 보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 이들에게 대성사의 지식과 경험은 크게 도움이 되었다.
 전쟁의 기운은 북만주 하얼빈까지도 몰려들었다. 1941년 11월 12일자 부산일보에는 ‘반도의용대 하얼빈 도착. 만선일여(滿鮮一如)를 실현’이란 기사가 실렸는데, 근로정신대로 징발한 조선 청소년 150명이 하얼빈시에 도착했다는 내용이다. 조선 각지에서 청소년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인력을 모아 전쟁에 필요한 강제 노동력을 수급하여 접적 지역인 러시아 국경지대까지 끌고 간 것이다.
 대성사는 이곳에 근무하면서 유럽의 최신 유행뿐 아니라 혁명 후 소련의 사정 등 세계정세를 민감하게 듣고 파악하게 된다. 이 시절부터 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늘 단파라디오를 지니고 세계 각국의 방송을 듣는 습관이 생겼다. 이후 평생 아침에 눈 뜨면 자연스럽게 라디오를 켜고 뉴스를 들으며 세상사 기운과 이치가 운행하는 사정에 귀를 기울여 지켜보았다.
 법원 대서 업무를 한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이듬해인 1941년 상당한 재력을 갖춘 대성사의 인척이 북만주에서 사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군수물자 징발에 식량은 우선순위였다. 곡식 값은 계속해서 오르고 있었다. 인척은 만주 사정에 밝고 업무 처리가 꼼꼼하여 빈틈없으며 직원들을 잘 통솔하는 대성사에게 정미소를 함께 경영하자고 제의했다. 정미소를 운용하는 데는 많은 자금이 필요한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만주국의 허가를 얻어내는 일이었다. 행정처리와 관청 일에 밝은 대성사가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본은 인척이 대기로 했다. 적합한 곳을 찾아 결정한 위치는 하얼빈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150여 킬로미터 떨어진 주하(珠河,주허)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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