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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평등(三平等)의 실천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는 종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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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9-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효강 대종사 추선특집 서브카테고리 효강 대종사 추선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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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9-06 15:40 조회 7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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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평등(三平等)의 실천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는 종단으로”

부처님의 평등은 ‘원융무애의 상태에서 전부가 하나다’는 가르침
화합은 ‘희생정신’, 진리에 입각해 실천해야 우리의 수행도 완성


 오늘 제78회 추계 강공회에 즈음하여 여러 스승님들께 ‘화합’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과 종조 원정 대성사님의 법설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어찌하면 화합을 할 수 있느냐?” 부처님께서는 깨치고 보니 부처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을 비롯하여 삼라만상의 모든 현상과 작용이 부처 아닌 것이 없고 심지어는 미물까지도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교에는 등류법신(等 類法身)이라는 말이 있는데 나를 비롯한 모든 것이 법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부처인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느냐에 대해 ‘삼평등(三平等)’으로 설명하셨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평등이란 것은 ‘값어치가 같다’, ‘하나에 하나 더하면 둘이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다’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한 삼평등의 평등의 뜻이 ‘원융무애의 상태에서 전부가 하나다’는 가르침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든 것이 각기 다른 개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근본으로 들어가면 그 불성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평등이란 부처와 나와 모든 중생이 하나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인데 이것이 하나가 안 되면 장애와 고통이 따르게 됩니다. 현재 우리 주변을 한번 보십시오.

 지구촌의 모든 인류가 서로 대립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온갖 고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근간에 저 이슬람 계통에 중동 산유국들이 독재에 항거하는 온갖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전부 국민을 대립적으로 멸시하고, 자기 혼자만이 그 권력을 누리고자 하는 극단의 헛된 욕심에서 결국 공멸(共滅)로 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의 진리인 삼평등을 헤아리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인데 우리가 서로 대립하고 갈등을 일으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 사람이고, 그 사람이 곧 나입니다. 그 사람의 아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그 사람의 기쁨이 나 의 기쁨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자기 욕망대로 살고 항상 자기 위주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허나 그 욕망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고통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이오, 그러한 정신으로 살면 모두가 아름다워집니다. 상대방이 절대 나에게 적대감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삼평등의 진리를 체득하고 실천해 나가면 성불의 경지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삼평등은 우리 인간에만 국한되는 내용이 아닙니다. 자연도 모두 생명을 지니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도 자연과 하나라는 진리입니다. 자연은 나와 하나입니다. 나에게 조금 이롭다 해서 자연을 파괴하면 결과적으로 생태계가 파괴되고, 결국 인간에게 해를 가져다줍니다. 오늘날 자연은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먹는 것도 오염이 되었습니다. 그 근본원인은 인간이 자연을 무자비하게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연을 파괴 해왔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우리 지구촌이 몸살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기후의 이변은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대립적으로 여기며 정복해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진리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면 반드시 고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우리 종단도 정말로 삼평등의 진리에 입각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삼평등의 실천을 통해 그야말로 화합하는 종단, 진심으로 소통하고 화합하는 승단으로 나아간다면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습니다.

 『종조법설집』 138쪽을 보면, “내가 화합 바라거든 진애심을 내지 말고 지혜 밝기 위해서는 우치사견 하지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애심을 일으키면 상대도 마찬가지로 진애심을 내게 됩니다. 종조님께서는 “자기의 신용을 위해서 남을 속이지 말며 자기와의 화합을 위하여 다른 이에게 이간을 붙이지 말고 자기의 명예를 존중하거든 남을 비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또 “이타가 위대한 자리다”라고 말씀하셨 습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위대한 것이오, 결국 자기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또 “대중을 이롭게 하면 그 사례로서 자기도 이로우며 완전하고 장원한 이익이고 화평 과 은애로 살고 금세와 내생에 복락 무궁하다.”고 하셨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 남 의 이익을 짓밟고 올라가는 것은 참다운 이익이 아닙니다.

 우리가 화합하는 정신으로 산다면 분명히 화합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종조님께서는 “대중을 해롭게 하고 자기만 이롭게 하면은 그 보복을 받게 되는데 자기도 이익이 없고, 수원과 투쟁으로 살고 금세와 내생에 앙화가 다하지 않고 지옥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일상생활에서 중생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남의 단점 말하고, 남의 흠담을 빼면 재미없습니다. 우리가 남을 비방하는걸 보면, 남 흉보는 걸 생각해 보면, 내 허물도 역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종조님께서는 그때마다 희사하고, 정진하고, 참회하면 내가 더 이익이 되고 그 사람도 전부 복이 된다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볼 때는 반드시 나도 그런 허물이 있다, 부처님이 나에게 그런 법문을 보여 주신 거다,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화합은 ‘희생정신’입니다. 희생정신의 반대는 이기주의입니다. 전자는 대인이요, 후 자는 소인입니다. 전자는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고 후자는 자살행위이기 때문에 자기 도 죽고 남도 죽이며 결국 영원히 지탄을 받습니다. 남을 위한 희생정신이 필요합니다. 종단의 교전인 불교총전 664쪽 2번에 보면, ‘화합하는 여섯 가지 법’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부처님께서 교상미에 계실 때의 일이다. 비구들 사이에 어떤 비구가 계를 범했느니 범하지 않았느니 서로 시비를 하는 것을 보시고, 여섯 가지 화합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여기 존중해야할 여섯 가지 화합 하는 법이 있다. 꼭 기억하여 이법에 의해 화합해서 다투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첫째는 같은 계율을 지키며, 둘째는 의견을 맞추고, 셋째는 받는 공양을 똑같이 수용하며, 넷째는 한 장소에 같이 모여살고, 다섯째는 항상 서로 자비롭게 말하며, 여섯째는 남의 뜻을 존중하라.”
부처님은 이튿날 교상미에 들어가 걸식을 마치고 다시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대중들이 화합하지 못할 때는 저마다의 행동을 더욱 삼가야 한다. 법답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한 일이 있을 때에는 참고 견디며, 자비한 마음으로 법답고 친절한 일이 행해지도록 힘써야 한다. 물과 젖이 합한 것처럼 한자리에서 화합해서 한 스승의 법을 배우면서 안락하게 지내 야 할 것이다.”

<사분율>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 665쪽의 4번에 보면, ‘화합하지 못함은 남의 허물만 보기 때문이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허물을 뉘우쳐서 참회하고 다시 화합을 이루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종조님께서도 열반을 하시면서 “화합하라, 화합을 깨트리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 하셨습니다. 불교는 실천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종단이 정말로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진리답게 법답게 생활해야만 우리의 수행도 완성될 수 있고 종단도 크게 발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잘못에 대해 참회해야합니다. 나날이 참회하고 또 참회해야합니다. 우리가 갈고 닦아야 내세에 극락 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종단의 승직자가 갈고 닦으면 종단이 빛나고 교화가 흥성해집니다. 우리가 총지종의 역사를 잘못 기록하면 영원히 아픈 상처로 남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종단을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 가운데 화합이 가장 중요합니다. 화합을 깨트리는 것이 가장 큰 바라이죄에 해당한다고 하였습니다. 교도들이 스승을 볼 때 ‘참 부처님 같이 생활하시는 분이구나’하고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말로 설법하는 것보다 그것이 제일 큰 설법이 됩니다. 그게 교화가 잘되는 겁니다. 물론 경의 말씀을 전하고, 경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을 못하는 것이 교도들에게는 좋은 본보기가 못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분이 우리 정사, 전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로 스승님들 한분이 연을 다해서 이 세상을 떠날 때에 내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참석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승단이 소중하다는 것을 평소에 항상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화합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여러분들이 솔선수범하시고, 항시 종단을 걱정하면서 서로가 충고하고 잘못하면 서로가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의 진리 속에서 정성과 생명을 다해 생활할 것을 부처님께 서원합니다. <총기 40년(2011년도) 10월 18일 추계 강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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