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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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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7-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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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도경 스님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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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7-08 14:19 조회 1,6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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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3>
관념적 이야기로 화를 해결하는 것, 본질적 문제의 해결책 안돼 ... 자신을 관찰하며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

수행이 어떻게 삶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가?


살아오면서 많은 삶의 문제를 만나고 나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이렇게 많은 노력을 했지만 우리의 삶의 문제는 조금도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삶의 문제는 화입니다. 화가 나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화가 나면 우리는 그렇게 일어난 화를 해결하려고 해 봅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화가 나면 그 사람과 관계된 상황의 인과를 따져봅니다. 그 사람이 그런 말과 행동을 할 만한 상황인가?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원인을 제공했는가? 이런 것을 따져보면서 그럴 수 있겠다 라는 수긍이 생기면 화는 줄어듭니다. 


이것이 우리가 화를 해결하는 방식 이였습니다. 우리는 철이 들면서부터 이렇게 화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화는 조금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인과를 통해 화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내일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화가 일어나면 새롭게 인과를 따져봐야 합니다. 계속 새로운 상황과 이야기가 생겨나고 새롭게 화가 나면 또 새롭게 따져봐야 합니다. 이렇게 관념적 이야기를 통해서 화를 해결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수행은 어떻게 화를 해결합니까? 수행은 그런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은 화 그 자체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화를 수용하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화가 나의 것이 아니라 조건 따라 일어난 자연의 이치라고 이해하고자 하고 알아지는 대상이라고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해가 생겨나면 화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집니다. 다음날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다시 화가 일어났습니다. 


다음날 일어난 화가 전날 일어난 화와 다를까요? 화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전날 화에 대해 이해한 지혜가 다음날 화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이해가 화를 좀 더 바르게 관찰할 수 있게 하고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게 합니다. 10년 뒤에 일어난 화는 다를까요? 죽기 직전에 일어난 화는 다를까요? 모든 화의 성질은 동일합니다. 


수행은 동일한 것, 변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삶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할 수 없는 고유한 성질을 가진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알아차림의 대상은 화, 욕심, 보는 작용, 듣는 작용, 생각하는 작용, 느끼는 작용 등입니다. 


이것들의 성질은 영원히 변할 수 없습니다. 한 생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경험해야 하는 것이고 반복적으로 알아차림 하는 대상들입니다. 한 번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다음에 그 이해의 견해로 그것을 다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수행을 계속하게 되면 이런 일어남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깊어지고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더 자유로워집니다. 변할 수 없는 것을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펜줄럼 규칙)


저의 스승이 당신의 스승인 고 쉐우민 사야도와 함께 수행하고 계셨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사야도께서 법당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좌선이 끝나는 시간 정도에 큰 사야도께서 법당에 들어오셔서 바른 견해에 대한 법문을 해 주셨습니다. 사야도는 그 법문 듣는 것을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그 날은 수행 상태가 아주 좋아서 가볍고 행복한 마음으로 큰 사야도의 법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 때 법당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발을 씻는다고 물을 아주 세게 틀었습니다. 물소리가 너무 크게 나는 바람에 사야도는 큰 사야도의 법문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순간 사야도의 마음에 화가 아주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화의 마음이 물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가면서 거친 말들을 내 뱉고 있었습니다. 사야도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왜 조금 전까지는 마음이 그렇게 편하고 좋았는데 이렇게 금방 마음이 괴로워졌는가를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일어난 생각, 마음의 움직임, 느낌의 변화 등을 관찰하시고는 왜 그렇게 마음이 안 좋아졌는지를 깨달으셨습니다. 


당신이 큰 사야도의 법문을 소리라고 알지 못하고 스승의 법문이라는 생각에 좋아하는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 법문을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듣지 못하게 되니까 화가 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화가 났던 것입니다. 30만큼 좋아하면 얻지 못했을 때 30만큼 화가 나고 100만큼 좋아하면 얻지 못했을 때 100만큼 화가 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아하는 만큼 화가 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을 사야도께서는 펜줄럼 규칙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붓다에게 어느 날 누가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 있는 사람은 소 때문에 행복하고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이 말에 대해서 붓다는 이런 대답을 하셨습니다’ 소 있는 사람은 소 때문에 슬퍼하고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 분의 배우자, 아들, 딸을 가장 좋아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누구 때문에  가장 참기 힘든 괴로움을 겪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 분의 배우자, 아들, 딸 때문에 가장 큰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더 좋아하기 때문에 더 큰 괴로움을 겪는 것입니다. 그 좋아함이 집착의 좋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아들, 딸, 배우자 보다 더 좋아하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배우자, 아들, 딸도 나의 배우자, 나의 아들, 나의 딸이기 때문에 가치를 가집니다. 붓다께서도 세상의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한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가장 사랑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 때문에 진정 가장 큰 고통을 받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 때문에 가장 큰 고통을 받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에 대해서 집착하는 만큼 우리는 고통 받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자신을 알아보십시오. 그런 삶의 고통, 삶의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고통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고통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입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보십시오. 


우리는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있는 것을 받아드리고 인정하고 관찰합니다. 그런 관찰을 통해 그것에 대해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있는 것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관찰하면서 자신에 대해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져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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