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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경과 금강정경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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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7-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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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재동 연구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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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7-08 14:07 조회 1,7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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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경과 금강정경 ①

대일경의 순수한 실제


불교총지종은 총지종의 헌법에 해당하는 ‘종헌(宗憲)’에 소의경전을 밝혀두고 있다. 그 소의경전은 다음과 같다. 


1.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

   (大毘盧蔗那成佛神變加持經)

2. 금강정경(金剛頂經)

3. 대승장엄보왕경

    (大乘莊嚴寶王經)

4. 대승이취육바라밀다경

    (大乘理趣六波羅密多經)


이 중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 양부대경(兩部大徑)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대일경』은 대당(大唐) 개원 12~13년에 걸쳐 낙양의 대복선사(大福先寺)에서 선무외삼장(善無畏三藏)이 번역한 것이다. 『대일경』 7권 36품인데, 전6권 31품은 사상적 방면을 밝힌 것이고, 제7권 5품은 이에 근거한 염송공양(念誦供養) 행사차제(行事次第)를 설명한 것이다.

그 전6권 31품 가운데 제1품은     「입진언문주심품(入眞言門住心品)」으로 근본불인 대일여래의 깨달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를 여실히 설명하고, 제2품 「구연품(具緣品)」 이하에서는 실제 수행과 관련된 내용이 설해진다. 

「주심품」으로 대비로자나, 즉 대일여래의 성불의 경지를 설파한 것이라면, 제2품 이하는 신변가지(神變加持)로써 중생을 거두어 보살펴 교화하는(衆生攝化) 활동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이라는 경의 제목 속에 전체 경의 요령(要領)이 유감없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대비로자나의 실체


『대일경』에서 중심이 되는 것이 대비로자나, 즉 대일여래 그 자체이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항상 광명을 발하여 모든 것을 비추고, 모든 것을 살려서 기르고 있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모든 것을 관철하고 일체를 살리고 먹이며 기르고 있는 것이다.

이 대일여래가 일체의 뿌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고 하여도 우리 스스로가 사는 것이 아니다. 즉 대일여래가 이 개체를 통하여 살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일경』에 부처님께서 ‘나는 일체의 본초(本初, ①시초, 근본, 근원 ②차별을 떠난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성불(成佛)의 묘상(妙相)


그 대일여래의 자증체험 경지를 ‘성불’ 혹은 ‘성도’라고도 한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초월하여 일체의 것을 포섭하며 모든 것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원인이 되고 기본이 되어 일체의 것에 호소하여 중생의 본심을 자극하고 계발하게 된다. 

이에 중생은 대일여래의 모태로 돌아가고자 하며, 보리 즉 깨달음을 희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탐심이라든가 분노심이라든가 고양이의 마음이라든가 쥐의 마음이라든가 하는 세상의 60심을 넘어서 점차 출세간의 마음이 생긴다. 

출세간의 마음속에서도 저급한 것을 버리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향상되어 진급해 간다. 이에 승의(勝義)의 보리심이라고도 하고, 심속생(心續生)의 보리심이라고도 한다. 『대일경』에는 ‘심속생의 상(相)은 제불의 대비밀로서 외도는 알 수 없는 바이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신변(神變)의 대비(大悲)


이리하여 본유(本有)의 보리심의 뿌리에는 일체를 살려 기르는 천지화육(天地化育)의 자비의 힘이 흐르고 있다. 태양이 바른 것과 옳지 못한 것에도, 부(富)한 것과 가난한 것에도 잠시의 격의 없이 이를 비추듯이, 대일여래는 자비로운 빛으로 물(物) 속에 머물면서 물(物)과 함께 살고 물(物)과 함께 흐르며 일체를 동정(同情)하고 동감(同感)하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대비이자 신변의 힘이다. 이 신변의 힘으로 천지만유 도처에 무진(無盡)의 모습을 나타내며 무진의 설법을 이루며, 모든 내심(內心)의 움직임을 일체의 것을 통해 나타내고 있다.

이 신(身)과 어(語)와 의(意)의 삼무진장엄(三無盡莊嚴)의 활동이 대일여래의 유희신변(遊戱神變)이며, 이것이 우주생명으로서의 진실의 움직임이다. 이 진실의 움직임에 동화되어 행하는 것,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의 삼업을 조절하고 남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대비이며, 보리 곧 깨달음을 견실히 하는 데 근간이 되는 것이다. 이를 『대일경』에는 ‘대비를 근(根)으로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가지(加持)의 방편 


참으로 마음의 눈을 열어 보면 일사일물(一事一物) 무엇 하나도 대일여래의 모습이며, 설법 아닌 것이 없다. 이는 또한 자기 마음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 심안(心眼)을 뜨지 못한 범속한 사람에게는, 이 세계는 흙덩이․나무․돌 등의 집적(集積)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들 범속한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 인(印)․진언(眞言)․삼마야형(三摩耶形)․만다라(曼茶羅)를 설파하고, 이를 통해 우주의 실상을 열어 볼 수 있도록 대일여래가 항상 신력(神力)을 가(加)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를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고[信受] 파악하는 태도를 취할 때, 부처님의 신력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그 사람을 정화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육체의 눈, 육체의 귀를 통해 부처님의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을 가지(加持)라고 하는 것이다. 즉 ‘불일(佛日)의 그림자가 중생의 심수(心水)에 나타나는 것을 가(加)라 하고, 행자의 심수(心水)에 의해 불일을 느끼는 것을 지(持)’라 한다.

이러한 가지의 힘으로 말하자면 문자로 하는 진언 자체가 문자불(文字佛)로서의 법문신(法門身)이 되고, 인(印) 자체가 사상불(事象佛)로서의 삼마야신(三摩耶身)이 되며, 빚어 만들어지거나 쇠붙이를 녹여 만들거나 조각된 형상 자체가 인체불(人體佛)로서의 갈마신(羯磨身)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대일여래의 표현인 동시에, 이 가지력에 의해 신앙이 없는 것들인 일개의 목석에 지나지 않는 우상 그 자체가 즉시 진불(眞佛)로서 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일경』의 제2품 이하에는 인(印)․진언․만다라 등이 널리 설명되어 있다. 특히 제2품 「구연품」에서는 신무진장엄(身無盡藏嚴)을 보이기 위한 대만다라(大曼荼羅)가, 「전자륜품(轉字輪品)」에서는 어무진장엄(語無盡藏嚴)을 밝히기 위한 법문신(法門身)의 만다라가, 「비밀만다라품(秘密曼茶羅品)」에서는 내심(内心) 움직임을 보이는 의무진장엄(意無盡藏嚴)이 설파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지의 방편력으로 자유롭게 중생을 이끌 수 있는 묘용이, 힘들이지 않고 실현되는 경지야말로 실로 궁극의 승과(勝果)라고 할 수 있다.

즉 『대일경』의 요령(要領)은 ‘보리심을 인(因)으로 하고, 대비를 근 (根)으로 하며, 방편을 구경(究竟)으로 한다’는 삼구(三句) 속에 집약할 수 있으므로, 경의 제목의 성불(成佛)이 ‘보리심을 인(因)으로 하고’의 당상이고, 신변(神變)이 ‘대비를 근 (根)으로 하며’을, 가지(加持)의 말이 ‘방편을 구경(究竟)으로 한다’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으므로, 이를 총괄하는 것이 대비로자나, 즉 대일여래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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