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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방식, 삼성(三性) -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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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7-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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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법선 정사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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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7-08 13:38 조회 15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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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심뽀이야기 (20회)

존재의 세 방식, 삼성(三性) -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의타기성
삼성, 수행으로 성불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가르침 ... 수행은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

우리는 존재의 세 가지 상태를 원성실성, 변계소집성, 의타기성으로 설명하였다. 집착을 버린 본래의 있는 모습, 진여의 모습을 보기 위해 따지고, 분석하고, 사량하고, 분별하는 잘못된 집착의 모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또한 이러한 생각과 모습은 모두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의존하여 이루어진 허망한 모습임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의 관계를 살펴본다면, 의타기성에 의해서 원성실성이 밝혀지고, 원성실성은 의타기성을 통하여 나타나는 관계이기 때문에 서로는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불일부이, 不一不異). 이렇기 때문에 삼성은 유식에서 심식의 수행을 통하여 성불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가르침으로 설명되며, 심식의 변계소집성의 인식작용을 벗어난 원성실성의 획득이라는 유식의 수행의 목표를 설정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변계소집의 모습을 사실 또는 실체라고 확신함으로써, 그 모습이 의타기로 이루어진다는 사실과 그 이면에 숨어있는 진실한 모습인 원성실을 쉽게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원성실성이라 하고, 허망분별의 실상을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의타기성은 변계소집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근거가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허망한 것이나 거짓은 아니다. 모든 것이 인연이라는 의존 관계에서 성립한다.

유식학 전체가 그러하듯이, 삼성설의 취지도 결국은 세계를 왜곡해서 보지 않을 청정한 마음을 회복하자는 데 있다. 삼성설은 모든 것이 무(無)일 뿐이거나 허구일 뿐임을 밝히려는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진실로서 존재하는 세계가 왜 진실인 그대로 드러나지 못하는지를 깨닫게 하려는 이론이다. 

우리는 간혹 억지를 부리거나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 억지나 착각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을 감정에 치우쳐 사실이라고 확신하는 데서 발생한다. 이치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없는 것을 어떤 감정에 빠져서 그렇다거나 있다고 믿는다. 변계소집성이 바로 이와 같다.

우리가 간혹 무지하다는 것은 냉철한 사고를 지니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다 보면 사태를 바르게 파악하지 못한다. 이치로 따져 보면 엄연한 사실, 엄연히 있는 것을 상식이나 감성에 의존하여 파악하지 못하거나 아예 없다고 지나치기도 한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이 같은 습관의 대상을 말한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진리에 비추어 보면 엄연한 진실이지만, 집착이나 고정관념에 싸인 마음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아예 그런 것이 없는 양 무시된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과 멀어지고 허망분별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삼성은 결국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일 뿐이라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안락한 삶이 비록 물질적 풍요라고 할지라도, 그 풍요는 결핍으로 인한 마음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데서 추구되는 것이며, 그 마음의 고통을 달리 표현하여 번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번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므로, 우리는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간에 수행의 과정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번뇌를 제거하는 노력이다. 유식학은 번뇌의 원인이 바로 우리의 의식 활동 자체에 있음을 면밀하게 파악해, 의식 활동이 어떻게 번뇌로 생성되고 발동하는지를 해명하는 것으로 번뇌 극복의 수행을 유도한다. 다시 말하면 유식이라는 진실한 모습을 수긍하는 것이 수행의 출발이며, 이후 수행의 목표는 번뇌로서 발동하던 느낌과 생각과 앎 등의 모든 의식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비춰내는 순수한 상태로 바뀌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존재는 이처럼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단지 현재 상황에서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보았다고 해서 내가 본 것이 틀림없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 없다. 대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우리들은 세상이 이렇게 저렇게 있다고 하지만, 실제의 세상은 우리가 본 것처럼 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덧칠한다. 내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보지는 않는가? 내가 본 세상은 진실한 세상인지 의문을 가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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