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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사대부와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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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6-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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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칼럼리스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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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6-03 13:33 조회 1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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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사대부와 불교
고려시대 불교,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하나로 묶는 끈 ... 조선왕조 개창 명분을 세우기 위해 불교를 희생양으로

고려왕조는 지방에 근거지를 둔 호족이 중심이 되어 세워졌습니다. 왕건도 개경 근처의 호족 출신으로 다른 호족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고려는 후삼국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고려왕조에 협력한 지방의 유력한 계층에게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향촌사회를 관리하는 일정한 역할을 맡겨 아직 정비되지 않은 지방행정조직을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본관은 지명(地名)인 경우가 일반적이며 이러한 사례는 서양의 경우에도 나타나는데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de-, 독일어의 von- 등은 그 뒤에 지명이 나와서 어디 출신의 봉건 영주 출신임을 나타내준다고 합니다. 

고려는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되면서 호족들은 세력의 크기에 따라 대호족은 중앙의 귀족으로 중소 호족은 지방의 향리로 분화합니다. 고려는 모든 지방의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고 대다수의 군현의 행정을 향리의 자치에 맡겼습니다. 

동시에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관을 파견한 군현을 두었는데 이를 주군(主郡), 주현이라고 하고 향리의 자치에 맡긴 군현을 속군, 속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비중은 대략 주현 하나가 속현 4개 정도를 관리하도록 하였습니다. 서양의 봉건제도처럼 일종의 지방분권적 행정체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향리는 단순히 지방관을 보좌하는 역할이었다면 고려시대의 향리는 실질적인 지방관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지요. 

따라서 고려의 향리는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비중이 조선의 향리보다 높았습니다. 

사회적 지위를 구분하는 기준으로 통혼권(通婚權)을 드는데 고려의 향리는 중앙의 귀족과 통혼할 수 있었지만 조선의 향리는 양반계층과 통혼하지 못했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중앙의 문벌귀족과 지방 호족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려의 향리는 문과에 응시하여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수많은 문벌귀족이 몰락하면서 그 공백을 이들 지방 향리 출신의 관리들이 메우게 되는데, 이들은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신진(新進)사대부라고 호칭합니다. 고려왕조는 많은 전란을 겪었습니다. 

건국 초기부터 북방 유목민 계통의 거란족과 여진족의 침략을 받았고 마침내 몽골족의 침입으로 소위 원간섭기를 겪게 됩니다. 

이 시기의 지배층을 권문세족(權門世族)이라고 하여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과 구분합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친원파로 출세한 사람들로 다양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기의 문벌귀족이 건국주체세력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권문세족은 원나라에 기생하는 세력에 불과했습니다. 

자연스럽게 국가 운영의 실질적 업무는 전문 관료인 신진 사대부가 담당하였던 것이죠. 원나라가 약화되면서 한족(漢族)의 명나라가 세워져 몽골족의 원나라를 북방의 초원지대로 몰아내었습니다. 고려도 원명 교체기라는 역사적 전환기에 공민왕이 반원(反元) 자주정책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러한 개혁정책을 승려인 신돈이 맡게 되면서 개혁을 추진할 세력으로 신진사대부를 중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친원파 중심의 권문세족은 신돈의 개혁에 반발하여 신돈을 제거하기에 이릅니다. 신돈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타락한 승려가 아닙니다. 

그의 개혁은 과감했고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신진사대부를 중용하여 권문세족을 견제했고, 경제적으로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통해 권문세족이 빼앗아 간 토지를 본리 주인에게 돌려주고 억울하게 노비로 전락한 이들을 본래 신분으로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어쨌든 신진사대부는 더 이상 권문세족과 함께하기에는 세계관이 달랐고 두 정치 세력은 권력을 두고 경쟁관계에 서게 되었던 것이죠. 

신진사대부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흥무인세력의 중심인물인 이성계와 결탁하여 정권을 장악하고 결국에는 조선왕조를 개창하게 됩니다. 신진사대부는 이 과정에서 고려의 흔적을 지워버리려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교에 대한 탄압이었습니다. 고려시대 불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고 삶의 위안으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앙공통체인 향도(香徒)는 고위관리에서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고려인을 결속시킨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교를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왕조개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보았기에 정도전이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써서 불교를 비판하였던 것이죠. 

신진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 수 있었던 계기는 불교 승려인 신돈에 의해 마련되었지만 정작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 불교를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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