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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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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7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4-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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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4-02 14:26 조회 1,81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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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1>
바른 견해, 바르게 본다는 것은 수행의 결과이자 수행의 시작 / 마음은 이해할 수 있는 것,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냐

오온은 물질(색), 느낌(수), 인식작용(상), 다양한 의지작용(행), 아는 작용(식)입니다. 

<지난 호 물질(색), 느낌(수)에 이어>


인식작용(상)


이렇게 6가지 감각기관에서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통해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이라고 압니다. 그렇게 무엇이라고 아는 마음의 작용을 상이라고 합니다. 상의 작용은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세상을 알아오면서 끊임없이 훈련해서 너무나 능숙하게 진행됩니다. 책을 읽을 때 눈이 책 위를 한 번 지나가면 마음이 무슨 내용인지를 이해합니다. 그렇게 책의 내용을 해석하는 마음이 상의 마음의 작용입니다. 머리를 빗을 때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알아서 머리를 빗습니다. 머리의 모양을 생각하고 빗의 각도를 생각하는 마음이 모두 상의 마음입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 계단 높이를 생각하고 발을 얼마나 들것인가를 결정하는 마음도 상의 마음이 하는 일입니다. 


상의 마음작용은 너무나 능숙해서 자신의 일을 순식간에 스스로 합니다. 우리 존재의 진행에서 오온은 언제나 함께 일어납니다. 상의 마음은 우리 마음작용에 항상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알았다라고 하면 상의 마음을 통해서 안 것입니다. 상의 마음을 통해서 알았다는 것은 그것이 관념이라는 말입니다. 해석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아지는 모든 것은 관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관념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양한 마음의 의지작용(행)


아비담마에서는 마음부수로 52가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느낌과 상의 마음작용을 제외한 50가지를 행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행에는 다양한 마음의 작용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주요한 마음의 작용은 마음의 의지 작용들입니다. 


접촉, 의도, 노력, 결정, 신심, 알아차림, 걱정, 졸림, 아만 등의 마음의 의지 작용들이 여기에 속해 있습니다. 상의 마음작용으로 인한 관념적 해석에 대해서 내 마음에 있는 가치정보가 투영되면서 생겨나는 욕심, 화, 어리석음의 마음작용도 행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관념적 해석에 대해 실재하지 않은 실존성을 부여하고 그걸 믿으면서 스스로 ‘좋다, 싫다’의 반응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함으로써 계속적으로 욕심과 화와 어리석음의 굴레 속에서 고통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아는 작용(식)


마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작용이 아는 작용입니다. 알기 때문에 ‘마음이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아는 마음의 작용을 식이라고 하고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5문을 인연해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아는 마음이 의식입니다. 


이 아는 마음들은 이름이 아는 마음이지만 대상이 무엇인지, 어떤 이름인지, 어떤 모양인지를 알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마음은 단지 처음 대상을 접해서 대상과 반응하는 마음이고 순수하게 대상을 인지하고 대상으로부터 정보를 취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이 수행을 하면서 ‘아는가?’라는 질문을 통해서 확인하는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실재하는 것은 모양도 위치도 없기 때문에 인식되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아는가?’라고 물으면 안다는 것이 마음에 수긍됩니다. 그렇게 아는 작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가 가르쳐주신 길-8정도


붓다는 당신의 제자들이 걸어 가야할 길을 그 사람의 성향에 맞추어서 아주 다양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양한 방법을 대표해서 말할 때는 항상 8정도를 이야기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노력, 바른 알아차림, 바른 마음의 고요함입니다. 


8가지 길을 돌아서 새롭게 도착하는 곳은 다시 바른 견해입니다. 처음의 바른 견해와 마지막의 바른 견해가 말로 표현하면 같은 말로 표현되겠지만 지혜의 깊이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깊이를 가지는 것입니다.


바른 견해


수행의 시작입니다. 바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그릇되게 보아왔고 그런 것이 아주 고착화되어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어떤 생각을 볼 때 불안한 생각이라는 시각으로 보아서 불안감을 느끼고 두려운 생각이라는 시각으로 보아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름답다는 시각으로 보아서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기고 추하다는 시각으로 보아서 없애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그러하듯이 이렇게 일어나는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생각은 생각이 일어날 만 했으니까 생각이 일어난 것이고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자신의 작용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생각과 보이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견해입니다. 내가 그릇된 견해로 보았기 때문에 내게 고통이 생겼던 것입니다. 고통이 생겼다는 것이 그릇되게 보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수행은 나 자신을 바르게 봄으로써 내게 일어나는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자신을 바르게 보십시오’라고 해도 우리는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무엇이 바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바른지 알기 위해서 자신을 관찰하고 이해해가야 합니다. 진실한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생겼을 때 그 이해가 자신을 바르게 바라보는 바른 견해가 됩니다.

바른 견해는 수행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수행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수행은 무엇을 체험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체험을 매 순간 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체험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눈 뜨면 본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체험입니까? 소리 있으면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체험입니까? 존재의 진실된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체험은 이것으로 충분하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쉼 없이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체험이 아니라 그 체험을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이 바르다’라고 하는 것은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생기게 하기 위해서 알아차림을 해가면서 바른 견해를 일으켜줍니다. 우리가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라는 바른 견해를 일으켜 주는 것은 바로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어서 수행하는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런 바른 견해가 있을 때 수행을 바르게 하는 것이고 바른 견해가 없을 때 수행을 바르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가지고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알아차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자신에 대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런 이해는 수행이 계속됨에 따라서 점점 깊어지게 됩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새로운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면 이 이해는 다음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더 깊은 바른 견해가 됩니다. 내가 화를 알아차림 하면서 화에 대해 새롭게 어떤 이해가 생겼다면 다음 순간 이런 이해의 견해를 가지고 화를 보게 됩니다. 그 이해가 새로운 화에 대한 바른 견해가 된 것입니다. 수행의 과정이라는 것은 자신을 좀 더 바르게 보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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