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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원 우리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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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0호 발행인 총지화 발간일 2001-01-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사원탐방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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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박현수, 황의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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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7 07:09 조회 2,1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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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원 우리 스승님
광주 법황사 법수원 전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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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실존적 철학이다.

사회학에서는 인간의 행위에 담겨있는 주관적뜻, 목적의식, 도덕적인 결단, 사회규범 가치 등을 중분히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여러가지의 연구방법론이 사회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추체험 연구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장애인의 의식에 대해 연구하고자 하는 사회학자가 있다면 그 방법 중에는 장애인에 대한 통계자료를 모아 연구할 수도 있고 그들의 행위 몇 가지를 연역체계 를 통해서 연구할 수도 있지만 장애인들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과 같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면서 그들을 의식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방법을 추체험 연구 방법이라 한다. 이것은 사회학을 연구하는 한 방법론이지만 종교의 포교론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일 수도 있다. 대중속에 들어가 교화하고자 하는 그들과 같이 생활하며 같이 느끼고 같이 기쁨을 나누고 같이 아파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같이 실천하는 것 추체험 포교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면으로 보면 일찍이 우리 종단은 이를 포교에 활용하고 있다고 볼 수 았다. 우리 종단은 종단의 창종이념과 총지종의 지표에서 밝혔듯이 첫 번째가 생활불교이다. 아울러 종조 원정대성사님께서는 불교는 “실존적삶의 철학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빛고을 광주에 원덕서원당이 개설되고 부산 정각사에서 정각원전수님 아래에서 수행 중이던 법수원수님이 초대 주교로 죽비를 잡으셨던 1983년의 광주의 분위기는 참으로 살법하고 암울하고 분노와 아픔이 가득 담긴 무거운 침묵많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광주민주행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인 물결로 충장로 도청 등에는 흔적도 없이 말라 버렸지만 광주시민들의 가슴속에는 하나도 마르지 않은 채 가득가득 고여 있었다. 그들의 아픔과 비애와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부처님의 자비로서 어루어 만져주고 부처님의 지혜로서 달래주고자 전수님께서는 광주민주항쟁 당시 희생된 영가들을 위한 1000일 불공을 시작 하셨다. 물론 그 당시 그들의 이름조차도 거론되는 것을 통제했던 시절이라 그들을 위해 불공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울 수는 없었다. 주위의 많은 만류에도 전수님께서는 부처님의 자비를 행하고자 하는데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 하시면서 자신이 교화의 시작을 이곳 광주에서 하게 된 것도 아픔이 있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아픈 상처를 닦아주라는 부처님의 큰 뜻이라 생각한다고 하셨다. 쉽게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켤코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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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언밀교도량을 세우고자

요즘은 사찰을 건축하거나 탑을 세우거나 부처님을 모시는데 몇 가지 공통적인 추세가 있다. 그 첫 번째가 무조건 최고만 지향한다는 것이다. 어떤 부처님은 크기가 동양에서 최 고라느니, 경내의 무슨 탑이 아시아에서 최고 높다느니, 아니면 대웅전 전체를 순금으로 칠한다, 불상이 세계에서 제일 큰 옥으로 만들었다는 등 참으로 한심한 중생들의 욕심을 보는 것 같아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법황사의 외형은 보기에조차 안 서러울 정도로 초라하다. 비만 오면 서원당 사택 주방 할 것 없이 빗물 받치는 그릇들을 사방팔방에 널어놓아야 하고 일제시대때 지은 건물이라 외형적인 형태조차 도저히 절이라고 보기는 상상도 하기 어렵다. 더욱이 현재는 빗물 새는 것을 막기 위해 지붕전체에 천막을 덮고 그 위에 천막이 날아가지 못하게 하느라 폐타이어를 묶어 얹혀 놓으니 어리석은 중생의. 눈으로 생각 없이 그냥 쳐다보면 고물상이나 폐품을 수집하여 모아놓은 창고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은 눈에는 더욱 이상하게 비추어진다. 불교총지종 법황사라고 현판 은크게 붙여 놨는데 눈 씻고 봐도 절은 보이지 않는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외형이 무슨 소용이 있나 부처님만 계시면 그곳이 곧 법당이라 하지만 근기가 낮은 우리 중생은 쉽게 마음에 와 닫지가 않는다. 그래서 전수님께서는 이곳 광주에 누구나 쉽게 찾아와 부처 님의 자비로 마음의 위로를 받고 부처님의 지혜로서 어리석음을 벗을 수 있는 진언밀교 도량을 세우고자 서원을 발원하여 20여년을 수행 정진 중이시다. 그것은 번듯한 서원당을 갖고자 하는 전수님의 개인적인 욕심이 아니라 많은 중생들에게 부처님의 자비 통해 서로에게 공덕을 회향하게 하고 한사람이라도 더 부처님 곁에 두고자 하는 하화 중생을 행하는 승직자로서의 사명감이다.


금강 같은 신심으로

처음 원덕서원당으로 개설하였을 때부터 전수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수행 하고 같이 절망하며 온갖 장애를 함께 넘어온 많은 교도들이 지금도 법황사를 굳건히 지 키고 있다. 20여년을 승직자와 교도가 같은 사원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총지종이 아닌 타 종단 아니 타종교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부처님이 맺어준 인연이라 고 하지만 그것은 우리 총지종만이 갖는 진언수행자로서의 금강 같은 신심이 아니면 불가 능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불교는 인연을 중요시한다. 오고 가고, 나고 죽음을 다 인연이라는 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그러나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심이 극으로 기승을 부리는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승직자와 교도, 스승과 제자, 혹은 교도와 교도로서 서로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20년가까이 그 인연을 끊지 않으며 서로를 신뢰하고 아낄 수 있다 는 것은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의 은혜이며 진언밀교의 위신력이며 전수님의 법력일 것이다. 또한 전수님이 갖춘 인간적인 성품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 여긴다'. 전수님은 비록 여 자의 몸이지만 그 성품은 어느 남정네 못지 않게 시원스럽고 대범하다고 종단 내에서는 평해지고 있다. 그러한 성품이 지역감정이 극심하던 1983년 경상도에서 이곳 광주까지 오셔서 교화를 처음 시작하여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오늘날까지 법황사를 이끌어 왔 을것이라고 추측된다. 법황사는 한때 학생회, 청년회, 자성학교, 신도회등 여러 신행단체 를 조직하여 운영하였고, 사원 내에 학생들을 위한 무료 독서실은 그 사용자수가너무 많아 자리가 항상 부족했다고 한다. 그리고 합창단을 조직하여 수많은 경연대회에 참가하여 수상도 여러번 했다고 한다. 자성일마다 서원당에는 교도들로 가득하여 서원당 밖에까지 앉아 법회를 봤다고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도회만 운영되고 나머지는 전부 와해되었 다. 여러 가지 원인이 야기되었지만 전수님은 본인의 수행이 부족한 탓이라고 말씀히시며 자만심에 빠지기 쉬운 중생에게 부처님이 주신 큰 가르침이라고 하신다. 아직 법황사에는 금강 같은 신심을 가슴 가득 담고있는 진언수행자들이 있고 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지혜 를 밝히고자 수행중이니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세운 서원을 결국 이루어지게 도와주시리 라고 말씀하시는 전수님의 입가에는 연꽃같은 편한 웃음이 가득 묻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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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력

총기 11년 정각사근무

총기 12년 원덕서원당(총기 13년 법황사 개명) 주교

총기 18년중앙종회의원 선임

총기 25년 밀인지(대전수) 승서

총기 28년 원의원


인터뷰 

▶ 스승님 건강하시죠? 법황사의 사원 여건이 참으로 열악하군요.

아직 내 그릇이 모자라니 수행을 더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이겠지요. 우리 교도들도 서원을 세우고 열심히 정진중이니 곧 좋은 소식이 있겠지요.

▶ 보살님이 그러시던데 비가 새면 손수 지붕위에 올라가 고치신다고 하시던데요(웃음)

덕분에 사다리 타기, 지붕위로 건너뛰기는 전문가 수준이죠(기자웃음). 보시다시피 건물이 낡아 여름에 비가 오면 지붕 이곳 저곳에서 비가 셉니다. 그렇다고 서원당 안에서 우산 펴놓고 불공할 수는 없고, 불공하러 서원당에 나온 교도들 보기 미안해서 지붕 위에 올라가 비가 새는 곳의 기와를 들어 비닐을 한 장씩 깔아주는 임시방편식 수리를 합니다.

▶ 처음 이곳에 왔어 어려움이 많았으리라 생각되는데요.

처음에 와서 시쟁에 갔는데 사람들이 내 말에 대꾸도 안해요 물건을 살려고 해도 잘 팔려고 하지도 않고, 나중에 대가 쓰는 경상도 사투리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 벙어리처럼 지냈어요(웃음). 광주민주항쟁이 1980년 5월에 있었는데 내가 광주에 온 것이 1983년 이었으니 경상도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나 배타심이 상당히 심했지요 지금은 지역감정 이라는 것이 정치판에만 존재한다면서요.

▶ 그런 상황에서 교화하기가 상당히 어려웠겠습니다.

아뇨. 부처님은 전라도니 경상도니 하면서 구분을 하지 않으셨거든요(일동웃음)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곳사람들의 아픔을 어떻게 하면 나누어 가질 수 있을 까.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래서 처음 시작한 것이 당시 희생된 영가들을 위 한 천일불공이었습니다. 그것도 쉽지는 않았죠. 지금은 희생된 사람들 모두가 명예도 회복되고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어 혜택도 받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그들은 국가를 혼란 에 빠트린 범법자였고 소위 말하는 빨갱이였으니 주위에서 만류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범법자도 빨갱이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자비의 손길이 필요한 불쌍 한 중생일 뿐이죠.

▶마지막으로 승직자로서 꼭 갖추어야 할 덕목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스승님: 글쎄요. 승직자뿐만 아니라 진언수행자라면 꼭 이것 하나는 강조하고 싶습 니다. ‘자기가'이롭고자 한다면 먼저 남을 이롭게 해야 할 뜻이 있어야 하며 님을 해롭 게 하고 자기만 이롭게 하려 하면 그 이익은 길지 못하며 또 사람은 많아도 도와 주는 이 없다.’ 종조법설집에 있는 종조님 말씀입니다. 바로 자리이타를 쉽계 설 명한 부분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라면 누구나 말이나 행동하기 전에 꼭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긴시간 좋은 말씀 그리고 취재에 많은 협조 감사합니다. 법황사 062)676-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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