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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참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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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3-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법문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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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칼럼리스트 김태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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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1 18:38 조회 5,44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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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참구생활
동서 문명의 융합으로 새로운 문명 창출 선불교, 중국적이지만 동시에 세계적

인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중의 하나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사실을 듭니다. 중국 문명과 인도 문명은 그 성격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두 문명이 불교를 매개로서로 만나서 융합되는 과정이 경이롭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언어적측면에서 인도 문명은 소리글자인 산스크리트 문자를 사용하였고, 중국은 뜻글자인 한자를 사용하였습니다. 인도 문명은 ‘0’과 같은 개념을 발명하고 숫자의 단위에서도 항하사(강가강의 모래 수에 해당하는 숫자)같은 것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반면 그림문자에서 출발한 한자는 대상을 그려서 문자가 만들어진 까닭에 매우 구체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통찰력을 뜻하는 insight에 대응하는 한자어는 천리안인데 천리까지 보는 능력이라는 뜻으로 구체적임을 알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질적인 두 문명이 접촉하는 방식도 매우 평화적인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그 산물이 바로 선불교인 것이지요.

이렇게 이질적인 문명이 서로 만나서 새로운 문명을 싹틔운 사례가 서구 문명에도 있습니다. 서구문명은 헤브라이즘(Hebraism)과 헬레니즘(Hellenism)의 두 기둥위에 세워진 건축물로 비유합니다. 두 문명은 그리스로마 문명권에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이 포함되면서 본격적인 접촉을 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이 그리스의 방언인 코이네어(Koinē)로 쓰여졌다는 점이 두 문명의 접촉을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이는 동지중해 지역이 그리스의 영향권이었으며, 이 시기 코이네어는 오늘날의 영어처럼 공용어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헬레니즘 문명권의 여러 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었기에 모국어보다 당시 국제어인 코이네 어에 익숙한 상태였죠. 그래서 이들을 대상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위해 코이네어로 신약 성경을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곧이어 그리스어 성경은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기독교가 카톨릭과 정교회로 분리되면서 전자는 라틴어가 후자는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사용하게 됩니다.

한편으로 그리스 로마 문명은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이도교의 우상숭배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철저히 파괴합니다. 이는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인 탈레반이 우상파괴라는 명분으로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 상황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하나의 뿌리에서 비롯한 종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 무제 때에 동서 교역로가 열리면서 기원 전후한 시기에 불교도 전래되었습니다. 이러한 불교가 중국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올라선 시기가 바로 당나라 때입니다. 당의 지배층이 북방 유목민이 한화한 선비족으로 외래사상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였습니다. 또한 이 때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이 일어나 페르시아를 정복하게 됩니다. 이들 페르시아인들은 신앙의 자유와 자유로운 무역을 찾아 대거 중국으로 이주하였습니다. 페르시아 문명은 서아시아의 중심 문명으로 이들이 가져온 많은 선진 문물은 당이 국제적인 문명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이란 계통의 소그드인의 후예였고, 시선으로 추앙받는 이백도 서역계통의 혼혈인으로 추측되고 있음은 페르시아 문명이 얼마나 커다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은 그야말로 동서 문명의 융합으로 새로운 문명을 창출하였고 이웃 나라에 영향을 주어 동아시 아문명권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때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에 이르는 한국문명의 절정기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두 문명의 결합이 낳은 최고의 산물은 다름 아닌 선불교입니다. 보통 인도를 아버지로 하고 중국을 어머니로 하여 탄생한 것으로 비유하는 선불교는 지극히 중국적 불교이지만 동시에 세계적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사상에 많은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산스크리트어는 인도 유럽어의 한 종류로 한자 문화권의 중국어와는 매우 이질적이었습니다. 선종의 소의경전이라고 할 수 있는 금강경과 반야심경에서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추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종에서는 그러한 추상적인 내용이 매우 구체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납니다. 선문답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으로 일상생활에서 주고받은 문답에 의해 금강경과 반야심경의 진수가 펼쳐지는 것이지요.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금강경의 내용이 선승들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 체현된 것이 바로 화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승들의 문답은 치열한 수행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지만 너무나 일상적이라서 어떤 때는 너무 유머스러워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조주 스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느 날 두 스님이 조주 선사를 찾아왔다. 조주가 물었다.

“스님들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차나 한 잔 드시게(끽다거).”

또 한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와 본 적이 있습니다.”

“차나 한 잔 드시게.”

원주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와 보지 않았던 사람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신 것은 그만두고라도, 무엇때문에 전에 왔던 사람에게도 차를 마시라고 하십니까?”

조주 선사는 원주를 불렀다.

“원주여!”

“예”

“차나 한 잔 드시게.” 

<조주록 중>


저는 이 선문답의 의미를 모르지만 읽으면서 그냥 웃음이 나왔습니다. 왠지 모를 행복한 웃음이었습니다. 조주스님이 남기신 시를보니 이 분의 삶이 마냥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원주는 나름 이상해서 물어봤는데 돌아온 답은 차나 마시라는 말이니 상상하건데 “에구 뭘 물어봐, 차나 마시지.” 하는 느낌이 아닐까요? 원주는 나름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깨달은 바가 없어서 저 문답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자꾸 보고 참구하면 부처님 발끝에라도 닿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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