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1>

페이지 정보

호수 24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5-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도경스님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도경스님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2 07:29 조회 5,782회

본문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1>

현재는 수행의 시대라고 한다. 이는 대중들이 복을 비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번민과 고뇌의 고통으로부터 평안을 얻고자 하는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한국불교도 이에 부응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조께서도 단순했던 과거와 복잡한 현대의 ‘재생의세’ 하는 법이 다르다고 설파하셨다. 과거 우리사회가 물질적 빈곤의 시대였을 때에는 ‘살아서 복을 구하고 죽어서 극락왕생’을 바라는 기복 불교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의 시대는 애초 부처님께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던 목적에 부합하는 수행을 통한 해탈 즉 수행을 통한 마음의 평안, 번뇌와 번민으로부터 해탈의 불교가 요구되는 시대라 볼 수 있다. 지금 한국의 불교도 수행의 시대에 발맞춰 세계의 다양한 수행방편이 소개되고 많은 수행자들이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종단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 대비하자는 의미에서 다양한 선지식들의 수행법문을 소개하고자 기획했다. 이를 통해 우리 수행법을 보완하고 발전해 나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


나는 여러 해 동안 남방에서 수행했습니다. 이런 저런 수행들을 전전하면서 언제나 무엇이 바른 수행인가를 고민했습니다. 이렇게 찾고 고민한 끝에 내가 마침내 진심으로 귀의한 수행법은 미얀마 쉐우민 수행센터의 수행법입니다. 흔히들 심념처라고 부르는 수행방법입니다.

쉐우민에서 수행지도를 하시는 우 떼자니야 사야도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세하게 가르치시는 스타일이 아니십니다. 수행의 기본을 가르쳐주시고는 제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하십니다. 이런 지도방법이 더 깊은 이해를 가져오는 한 측면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길을 찾지 못하는 문제도 있음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수행방법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왜 수행을 하는가?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합니다. 수행도 우리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하는 활동입니다. 보통의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적 조건을 바꾸는 것으로 향상시키려 합니다. 수행은 우리의 삶을 우리의 내적 조건, 즉 마음을 바꿈으로써 향상시키려 합니다.


어느 비구가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붓다는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붓다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고통과 고통의 해방을 가르친다.’

붓다는 삶의 모든 문제를 고통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시는 고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느낌으로써의 고통과는 다릅니다. 삶의 모든 불완전, 불만족을 고통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고통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붓다께서는 이렇게 하면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하시며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고통은 우리의 삶에서 옵니다.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은 현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는 여기입니다. 우리는 오직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합니

다. 이 순간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작용들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 세상을 안이비설신의, 색성 향미촉법으로 설명하고 계십니다. 붓다는 세상의 모든 진리를 말씀하시고자 하신 분이 아닙니다. 붓다는 삶의 문제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을 설명하시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 하고자 하신 분입니다. 눈, 귀, 코, 입, 몸, 마음에서 고통의 문제가 생기고 또한 거기에 그 문제의 해결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붓다는 세상을 6감각기관과 그 작용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세상을 봅니다. 우리는 내 밖에 있는 세상을 본다 라고 믿으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

신의 세상을 만들어가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우리 밖에 있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볼 때 우리 눈에서 무엇이 나가서 그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밖에서 무엇이 눈에 올 때 그 온 것을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압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해석과 밖에 있는 그것 자체가 같다고 믿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아는 것과 실재의 그것이 같을까요?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해석해서 그것이 무엇이다 라고 아는 것은 그것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보는 삶의 경험으로부터 옵니다. 그런데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삶의 경험은 다릅니다. 이렇게 정보가 다르게 되면 이 해석도 달라집니다.

닭소리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수탉이 울면 그 소리를 ‘꼬끼오’라고 듣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 비슷하게 듣습니다. 이렇게 비슷하게 들으면서 우리는 똑같이 듣는다 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비슷하게 듣는 것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문화권에 살고 있고 같은 말을 쓰고 비슷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수탉소리에 대한 정보가 비슷하고 이 정보에 따라서비슷하게 듣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다른 정보를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들을까요? 미국사람들은 수탉소리를 ‘칵커두들두(cock-adoodle-doo)’라고 듣습니다. 미국사람들은 수탉소리에 대해서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

문에 그렇게 듣는 것입니다. ‘꼬끼오’와 ‘칵커두들두’는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을 가져온 소리는 한 소리였습니다. 하나의 동일한 소리를 듣고 한국인은 ‘꼬끼오’라고 알고 미국인은 ‘칵커두들두’라고 아는 것입니다.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실재하는 소리를 알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따라서 행하는 해석을 알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석한 세상, 우리가 만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한 해석이 있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해석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가 투영됩니다.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추하다 등의 가치가 그 해석에 부여되게 됩니다. 좋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좋아하게 되고, 나쁘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싫어하게 되고, 아름답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가지고 싶어하고, 추하다 라는 가치가 부여되면 없애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부여한 가치에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며 우리 마음은 반응합니다. 이런 마음의 반응으로 인해서 우리는 고통 받게 됩니다.


실재하는 것에 대한 각자의 해석에 삶의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해석에 대한 가치 부여에서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가 생기는 것

입니다. 우리는 생각으로부터 많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런데 실재는 그 생각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 생각은 고통스러운 생각이라는 우리의 견해 때문에 고통스럽습니다.

어느 수행자가 수행홀에서 수행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평화롭고 활기차서 수행을 아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수행홀 밖에서 개 두 마리가 싸우기 시작합니다. 싸우는 소리가 아주 시끄럽습니다. 수행자는 순간 화가 납니다. 개들 싸우는 소리가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쉽게 화가 약해졌습니다. ‘개들을 어떻게 하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 마음이 평화롭고 활기차게 되면서 수행을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수행홀 뒤쪽에서 수행자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합니다. 그 소리가 아주 작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납니다. 일어나서 그 사람들에게 가서 따져야 했습니다. 그는 소리가 수행에 방해되었기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큰 소리가 수행에 더 많이 방해되고 작은소리가 수행에 적게 방해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재로는 아주 큰 소리가 수행에 적게 방해되었고 아주 작은 소리가 수행에 더 크게 방해되었습니다. 그는 큰 소리에 작은 화를 내었고 작은 소리에 큰 화를 내었습니다. 그는 왜 화를 내었습니까? 그는 소리 때문에 화를 내었습니까? 그는 소리 때문에 화를 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소리에 대해서 갖고 있던 가치, 견해 때문에 화를 낸 것입니다. 개소리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 란 견해를 가지고 있고 수행홀에서 떠드는 것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 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견해에 따라서 마음이 반응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 입니다. 문제는 삶 자체에 있는 것이 아 닙니다. 문제는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견해는 고정적인 것일까요? 견해는 전혀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견해가 나와 남이 다르고 나 개인에 있어서도 오늘과 내일이 다릅니다. 이렇게 견해는 가변적입니다. 견해가 가변적이란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삶의 문제, 고통의 문제는 견해에서 생깁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가변적입니다. 이런 가변적인 견해를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어갈 수있습니다. 고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붓다께서 발견하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견해를 바르게 함으로써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견해를 바르게 바꾸어가고자 하는 활동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부릅니다.


도경스님 소개 조계종 출가, 미얀마 파욱센터, 쉐우민센터에서 수행, 현재 밀양 ‘담마 숲’에서 수행지도 중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