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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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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3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2-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문화 서브카테고리 불교와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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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은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김은주 작가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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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1 08:26 조회 4,5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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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
정의롭지 않은 세상을 말하다

대중문화인 드라마는 대부분 주인공의 욕망이 실현되는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시청자의 욕구가 반영되며 주인공의 모든 욕망이 충족되길 바랍니다.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보기 때문에 주인공의 성공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삶의 위안을 얻지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연출진과 작가는 이 역할에 그동안 충실해왔습니다.

그런데 201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짝패>(김운경 극본, 임태우, 이성준 연출)는 이 쉬운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시청자의 욕구를 철저하게 외면했습니다. 주인공은 타인에 의해 가족도 신분도 잃고 고생하면서 살았지만, 그는 제 지위를 찾지 못했고 죽음을 맞았습니다. 한 마디로 개고생하면서 살던 주인공의 비참한 최후입니다. 완벽한 배신을 맞은 시청자로선 분노를 느낄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주인공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였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란 죄인은징계를 받아야 하는 것이고, 선인은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짝패>는 잘못은 바로 잡혀야 한다는 생각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고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짝패>에서 두 주인공은 신분이 뒤바뀌었습니다. 거지로 살아야 할 귀동(이상윤)은 양반으로, 양반집 아들 천둥(천정명)은 거지로 살아갔습니다. 노비인 막순이 천둥의 유모로 김진사 댁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아들 귀동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았으면 하는 욕심에 두 아이를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게다가 천둥은 엄마라고 믿는 막순의 사랑도 받지 못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거지움막에서 고생하는 불쌍한 천둥에게 잘해줄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양심적인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김진사의 귀한 아들 천둥은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최하층민인 거지로 살아야 했습니다.

거지굴 출신 천둥에겐 사랑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정신적 지주에게서 학문을 배운 천둥은 그의 딸 동녀(한지혜)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동녀 또한 천둥에게 마음이 있었고 사람들은 둘이 잘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지금까지의 드라마 관습에서는 선량한 주인공은 악인에게 희생당했습니다.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필요충분조건을 갖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녀는 천둥이 아니라 양반집 아들 귀동을 선택했습니다. 어린 동녀의 마음은 사랑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자라면서 사회적 신분이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매우 현실적인 결정에 마음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천둥은 사랑하는 여인까지 잃었습니다. 평범한 드라마라면 이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시청자는 기대하겠죠.

그러나 그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드라마는 주인공이 장렬하게 전사하게 하며 끝맺었습니다. 민중봉기운동의 거두가 된 주인공은 세상의 부조리를 바로잡으려다가 죽음을 맞았습니다. 개인의 정의도, 그가 바로 잡으려던 세상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왜 이런 이야기를 굳이 힘들게 만들었을까요? 작가가 시청률을 생각했다면 절대로 만들 수 없는 완고한 고집이 반영된 작품이었습니다. 작가는 세상은 순순히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막순은 이기적인 여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완전히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엄마를 잃은 김진사댁 아들 유모로 들어간 막순은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도 배고파서 울고있을 자신의 아들 귀동을 걱정했습니다. 지극한 모성을 가진 막순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쁜 짓임을 알면서도 두 아이를 바꿔치기로 합니다.

그녀의 잘못은 모성이었습니다. 모성이 너무나 지극한 나머지 타인에게 고통을 주었지만 죄책하기 보단 이기적이고 뻔뻔해졌습니다. 과연 그녀를 벌준다면 어떤 벌을 줘야하는 걸까요? 이 또한 딜레마입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악인은 다 그럴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녀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어도 그녀가 받은 벌은 솜방망이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요.

세상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탐관오리 대신 불쌍한 서민이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실현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탄압을 받았던 서민이 권력을 차지했을 때 지금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 또한 탐관오리가 되는 악순환의 반복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전복하겠다고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몽상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완전한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한 작가는 주인공이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맺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돌고 돌아와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권선징악이 실현되고 모든 게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내놓은 작가는 실태를 바로 보라는 일침을 날렸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의롭지도, 올바르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답답하면서도 현실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김은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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