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2>

페이지 정보

호수 248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7-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도경스님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도경스님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7-09 14:47 조회 4,521회

본문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2>
“보인다는 성질이 바로 대상의 성질이고 그것이 법”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관찰해야

수행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이해함을 통해서 나의 삶의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관찰해야 합니다.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나는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이렇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아십시오. 그것이 알아차림입니다. 


보면 본다고 아십시오. 

들으면 듣는다고 아십시오. 

느끼면 느낀다고 아십시오. 

생각하면 생각한다고 아십시오. 

냄새 맡으면 냄새 맡는다고 아십시오. 

맛보면 맛본다고 아십시오. 


이렇게 자신에게 일어나는 것을 알아 가시면 됩니다. 왜 이런 것을 알아가야 합니까? 이것들이 실재로 이 순간 나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대상들을 알아가실 때 한 대상을 자세하게 보려고 하지 마십시오. 한 대상을 자세하게 보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상은 이미 관념화된 것입니다. 관념화된 대상을 자세하게 본다고 하더라도 실재에 대한 이해는 생기지 않습니다. 대상을 가볍게 보십시오. 그런 것이 일어났다고 가볍게 인지해주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힘주어서 애써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볍게 아십시오. 한 대상을 가볍게 아시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다른 대상을 압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작용입니다. 내가 한 소리를 듣고 있어도 마음은 또 다른 소리를 듣습니다. 각각의 대상에 각각의 마음이 따로따로 반응합니다. 대상이 다르면 마음도 다릅니다. 이 소리를 듣는 마음과 저 소리를 듣는 마음은 다른 마음입니다.

 

엉덩이에 느낌이 있으면 가볍게 느낌 있다고 아십시오. 그렇게 가볍게 느낌을 알면 다른 마음이 일어나서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가볍게 소리 있다고 아십시오. 그러면 마음은 자연스럽게 또 다른 느낌을 압니다. 그러면 그 느낌을 아시면 됩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마음이 대상을 알아가는 대로 아시면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법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자연스러운 법의 이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으로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알아지는 대상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알아야 할 것은 실재의 일어남

알아야 할 것은 실재의 일어남입니다. 관념적 해석은 우리의 관심이 아닙니다. 일어남 그 자체를 아십시오. 뒤차가 내 차를 ‘빵빵’거리며 지나갔습니다. 보통의 사람은 뒤차가 내 차를 빵빵거리면서 지나갔다고 압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이러한 관념적 해석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자는 실제 일어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들었다는 것과 보았다는 것이 수행자의 관심이고 알아차림의 대상입니다. 수행자는 봤다고 알아야 하고 들었다고 알아차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좌선을 할 때와 경행을 할 때가 모두 같습니다. 좌선, 경행 일상의 삶에서 항상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십시오.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것을 가볍게 알아 가십시오. 알아차림에 힘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음이 계속적으로 알게 되면 마음은 그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좌선을 하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마음이 멍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활발함이 약해지고 대상도 분명하지 않게 됩니다. 이럴 때는 마음의 활발함을 일깨워주어야 합니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지?’라고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에 일어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활발함이 생길 것입니다.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조사하는 것도 마음의 활발함을 키웁니다. ‘보는 것이 무엇이지?’, ‘어떻게 듣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십시오. 마음에 관심이 생기면서 마음의 힘이 좋아집니다. 이렇게 해도 마음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걷게 되면 몸이 활발하게 되고 몸이 활발하게 되면 마음도 자연스럽게 활발하게 됩니다. 


가볍게 알아가기 때문에 수행하는 데 큰 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능숙해지면 계속 이어지게 알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자신에게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알아가는 것을 이어지게 하십시오. 자신에 대한 관심이 계속 있으면 알아차림도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대상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 없이 일어나는 대로 가볍게 알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나게 됩니다.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상에 대해 좋아함의 반응, 싫어함의 반응을 하지 않게 되고 이런 반응이 줄어들기 때문에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물러납니다. 이렇게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물러나고 알아차림의 힘이 좋아지면 마음은 한순간 여러 가지 대상을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느낌과 소리를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한순간 여러 가지 대상을 한꺼번에 아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운전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한순간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알 수 있어야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여러 가지 것을 아는 것을 나는 단지 관찰하기만 합니다. 대상을 바꾸어가면서 아실 때, 마음이 가볍고 활기찰 때 가끔 한 번씩 알겠다는 생각을 멈추어보십시오. 알겠다는 생각을 멈추어도 앎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마음이 자연스럽게 스스로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알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알려고 하지 않아도 마음이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대상들을 한꺼번에 알아가는 알아차림의 상태가 이 수행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알아차림의 방식입니다.

 대상을 알고자 하는 마음 없이도 한순간 여러 가지 대상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때, 마음의 힘이 좋다고 생각될 때 가끔 스스로에게 ‘알고 있나?’라고 물어보십시오. 마음의 힘이 좋을 때 ‘알고 있나?’라고 물으면 알고 있다는 것이 마음에 수긍될 것입니다. 

알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알고 있다는 것이 수긍된다면 그것은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아는가?’ 스스로 묻고 마음을 확인

마음은 어느 곳에 고정적으로 있어서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작용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하고 대상과 더불어 일어나기 때문에 있다고 말합니다. 작용 그 자체가 마음입니다. 

작용한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안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본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듣는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생각한다고 알면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단지 아는 구나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직관적으로 마음에서 안다는 것이 이해됩니다. 


우리의 지혜 수준에서는 한순간 아주 많은 마음이 일어나서 아주 많은 작용을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마음의 작용이 아는 작용입니다. 안다는 것이 알아지면 자주 자주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확인하십시오. 그렇게 아는 마음을 알아가면서 대상을 중심으로 한 수행에서 마음을 중심으로 한 수행으로 수행의 기본 패턴이 변하게 됩니다. 


대상을 아는 것과 마음을 아는 것이 무엇이 다를까요? 여러분이 아는 대상은 어떤 모양, 어떤 리듬,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모양, 색깔, 길이, 내용, 장소 등은 모두 관념화의 도구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아는 모든 것은 관념화된 것입니다. 관념화되었다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재가 아니라는 말은 법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법이 아닌 것을 아무리 관찰한다고 하더라도 법에 대한 이해는 생기지 않습니다. 


마음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엉덩이 느낌이 있습니까? 느낌이 있습니다. 어떻게 느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알기 때문에 느낌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마음의 아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럼 그 아는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모양입니까? 얼마나 큽니까? 어떤 색깔입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럼 없습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모양, 색깔, 위치, 크기로 관념화시켜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작용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관념화되지 않으면서 고유하게 자신의 성질대로 자신의 작용을 하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마음은 관념화시켜서 알 수 없습니다. 마음을 안다면 법으로써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바로 법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을 계속 알아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법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법에 대한 이해가 진정한 자신에 대한 이해입니다. 

앞에서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란 말을 하면서 보이는 것은 관념적으로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보인다는 성질로써 하나라고 했습니다. 보인다는 성질이 바로 대상의 성질이고 그것이 법이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