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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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7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6-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연재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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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6-03 13:15 조회 4,931회본문
중생의 마음과 밀교수행 (16)
중생의 마음은 천차만별이고 수 천 수 만 가지가 된다. 그 표현에 있어서도 다양하기가 그지없다. 여기 중생의 마음을 진흙에 비유하고, 색깔, 뗏목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심(泥心)
이심은 진흙의 마음이다. 어떤 마음인가? 어리석은 마음을 말한다.『대일경소』에 진흙의 마음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진흙의 마음[泥心]이라 하는가? 이것은 바로 한결같은 무명심(無明心)으로 눈앞의 가까운 일을 분별하지 못하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글자 그대로 ‘밝음이 없다’는 것으로 지혜가 없음을 말한다. 지혜가 없다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밝지 못하다는 것은 어둡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중생을 무명중생(無明衆生)이라 하는 것이다.
밝음은 명(明)으로서 지혜가 있음이오, 어두움은 무명(無明)으로서 지혜가 없음이다. 무엇을 밝고 어둡다 하고, 무엇을 지혜가 있다 없다고 말하는가? 그것은 진리에 대해 밝고 어둡다는 것이오, 진리에 대해 밝은 것이 지혜요, 어두운 것이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인가? 진리는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이치를 말한다. 즉 우주 삼라만상, 세상의 이치가 진리다. 그리고 이를 아는 것이 지혜다. 따라서 진리에 대해 아는 것이 지혜이며,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가 무명(無明)이오, 어리석은 것이며, 지혜가 없는 것이다.
『대일경소』에서 ‘무명심을 율(律)에서는 진흙덩이와 같다’라고 하여 진흙에 비유하고 있다. 무명심(無明心)이 곧 진흙의 마음[泥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무명에서 벗어나야 하듯 진흙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진흙 속에 있는 것은 미혹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흙에서 빠져나오기란 쉽지 않다. 깊은 진흙일수록 빠져나오기는 더욱 어렵다. 그래서 여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방편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소』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진흙투성이의 진창에 빠지면 넘어가기 어려우므로 반드시 옮겨줄 수 있는 방편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교량 등을 빌려서야 이를 넘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약 이 방편이 있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선지식에게 돌아가 기대어서 방편을 개발해야 한다. 이로써 점차 무지(無知)를 제거하고 도리어 지혜의 성품이 생겨나게 된다.’
방편은 다양하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방편으로써 뗏목에 비유하듯이 방편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양한 수행교설이다. 일체에 대한 이해와 자각, 그리고 사성제를 바탕으로 한 팔정도 수행과 십선업, 육바라밀 등의 수행교설이 있으며, 계율이나 우리 밀교처럼 다양한 작법과 삼밀수행이 있다. 여러 방편 가운데 지속적인 정진을 통해 자기의 수행방편을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현색심(顯色心)
현색심은 색깔의 마음이다.『대일경소』에서 색깔의 마음을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색깔의 마음이라고 하는가? 그와 같아지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색깔로 물을 들이면, 그와 같은 색깔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유하면 만약 청, 황, 적, 백 등의 염색에 흰 실을 넣으면 곧 같은 색이 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와 같다. 착한 법을 보고 듣고서 그에 따라서 행하고 악한 일을 보고 들으면, 역시 따라서 보고 배우게 되는 것이다.’
즉 선지식을 만나면 선업을 배우고 익히게 되지만 악지식을 만나면 악업을 따라하게 된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중생세계에서는 악은 악끼리 만나고 선은 선끼리 만나는 것이 일반이다. 이러한 비유는 아주 많다. ‘근묵자흑(近墨者黑) 근주자적(近朱者赤) 거필택린(居必擇鄰) 취필유덕(就必有德)’이란 말도 있다. ‘먹을 가까이하는 자는 검어지고 주사를 가까이하는 이는 붉어지니 거처할 때는 반드시 이웃을 가리고 나아감에는 반드시 덕 있는 사람에게 가라’는 말이다.『소학』「붕우편」편에 나오는 말이다.
연탄 배달하는 사람은 손과 얼굴에 검은 색이 묻게 되고, 밀가루 반죽하는 사람은 얼굴에 흰색 밀가루가 묻게 되는 것처럼 비난하고 험담하는 사람 옆에서는 나쁜 것만 배우고, 칭찬과 배려가 넘치는 사람 곁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듬뿍 받게 된다. 이것 또한 공업중생(共業衆生)의 다른 모습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인(因)이 중요하지만 연(緣) 또한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래서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말씀하셨다. 인과 연의 화합으로 결과가 생기한다는 것이다.
종자, 씨앗도 중요하지만 어떤 환경과 조건을 만나서 얼마만큼의 영양분을 공급받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좋은 인이 되고 좋은 연을 맺을 수 있도록 열심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소』에서는 이렇게 설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증(自證)의 법을 구하는 데는 타인으로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며, 다른 연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현색심을 다스리는 법이다.’ 결국 수행은 자기가 해야 한다는 말이다.
판심(板心)
판심(版心)은 널빤지, 즉 뗏목의 마음이다. 뗏목은 물건이나 사람을 실어 나르는 도구다. 그러나 이것이 중량을 초과하면 가라앉고 만다. 이를『대일경소』에서 이렇게 설하고 있다.
‘무엇을 뗏목의 마음이라 하는가? 능력에 맞는 법만 따르고 그 밖의 좋은 것은 버리는 것을 말한다. 뗏목이 물 위에 떠 있어서 그 크기에 따라 온갖 물건을 실을 수 있는데, 중량을 초과하면 곧 이길 수 없어 끝내 기울어져서 물건들을 쏟아버리게 되는 것과 같이 이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러하다. 좋은 법을 가려서 취하여 자기의 능력에 따라 한 가지 법만을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이 법만을 행하고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팔재계를 익혀 행하는 데 이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나 다른 좋은 법은 행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마음은 자기가 좋아하는 법이 최고이며, 그래서 오직 자기가 좋아하는 법에만 집착하는 마음이다. 이를 벗어나는 법은 넓고 큰 마음으로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광대한 마음을 내어서 보리행(菩提行)을 학습하면, 이것이 판심(板心)을 다스리는 법이다.’ 특정한 가르침과 수행법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자랑할 것도 못된다.
수행은 몸과 입과 뜻으로 하는 것이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청정함은 몸과 입과 뜻에 있으며,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의 실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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