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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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10-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역삼한담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정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시인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10-12 10:57 조회 2,902회본문
늦은 모기가 극성이다. 잠이 들 만하면 웽하고 나타나 문다. 깜박 잠들었다가 불을 켜고 전자 파리채를 들고 살생을 한다. 한두 마리 잡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하룻밤에도 몇 번을 반복하니 낮에도 피곤하다. 언젠가 절에 갔다가 스님에게 물은 적이 있다. 스님도 모기를 잡느냐고. 스님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당연히 답을 듣지 못했다. 전자 파리채로 모기를 잡을 때마다 모기에게는 화염지옥이라는 생각과 그 스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도 내가 편하자고 밤마다 모기를 잡는다.
불금의 밤에도 모기 때문에 설쳤다. 주말은 늦잠, 출근하지 않는 자유가 아침 꿈속으로 스민다. 달콤하다. 한 주 동안 쌓인 피로가, 간밤 모기에게 시달린 스트레스가 풀려나간다. 느지막이 눈을 뜬다. 아내는 벌써 일어나 휴대전화 삼매경에 빠져 있다. 눈을 뜨자마자 아내에게 만두가 먹고 싶다고 슬쩍 떠본다. 나를 뻔히 쳐다보던 아내가 한마디 한다. “애, 서? 뭐 그리 먹고 싶은 게 많아.” 농과 담 사이가 웃음이 머문다. 그러고 보니 요즘 카레가, 수제비가, 칼국수가 먹고 싶다는 말을 몇 번인가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서울 종로구 신영동에 맛난 만둣집이 있다고 한다. 전에 가봤는데 먹을 만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신영동이면 집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다. 천천히 걸으면 40분쯤 걸린다. 날도 좋고 운동 삼아 슬슬 걸어갔다 오자고 했더니, 아내는 배고프다면서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올 때는 걸어오자는 타협안을 제시한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증일아함경』에 의하면 아내에게는 남편에게 없는 다섯 가지의 힘이 있다고 한다. 첫째는 색(色)의 힘이며, 둘째는 자기 주위의 가족과 친척의 힘이며, 셋째는 농사를 지어 살림을 하는 힘이며, 넷째는 아이를 통해 얻는 힘이며, 다섯째는 자기 스스로 정절을 지키는 힘이라고 한다. 반면 남편에게는 오직 부귀(富貴)의 힘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마치 삼종지도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아내의 ‘의무’가 아니라 ‘힘’이다. 나뿐 아니라 내 주변이 가지고 있는 힘이 다 아내의 힘인 것이다. 그 힘은 타율이 아닌 자율에 속한다. 남편에게 대접받는 것은 아내의 당연한 힘이고, 밥값을 계산하는 것은 의당 남편의 힘이다.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나와 홍제천으로 향한다. 슬그머니 아내의 손을 잡는다. 모롱이를 돌자 길 건너에 세검정이 보인다. 조선 영조 때 총융청(摠戎廳)을 옮겨 서울의 방비를 강화했는데,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지은 정자가 세검정이다. 세검정을 지나자 앞에 홍지문이 우뚝하다. 홍지문과 더불어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홍제천을 가로막은 문을 지나자 맑은 물에 비친 홍지문이 일렁인다. 그 일렁임 사이로 작은 물고기 떼가 헤엄친다. 파란 하늘과 구름이 물속에 잠겼고, 거꾸로 처박힌 나무들이 물결에 스친다. 조금 더 걷자 자라 한 마리가 바위 위에 올라 일광욕을 하고 있다. 산책하던 노인들이 난간에 기대 “자라야, 자라야” 마치 손주를 부르듯 한다. 자라는 무심한 척 느릿느릿 물속으로 돌아간다.
고였다가 휘돌아 흐르는 물을 따라 조금 내려오자 눈앞에 하얀 불상이 막아선다.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이다. 고려시대의 보살상으로, 흰색의 호분이 전체적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기 때문에 백불(白佛) 또는 해수관음이라고도 한다. 마애불상은 근래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2칸의 보도각이란 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아내와 난 마애불상 앞을 지날 때마다 기도를 한다. 아마 딸이 대학 입시를 앞둔 4년 전 어느 날부터였을 것이다. 지난해엔 고3인 아들을 위해 더 자주 기도를 드렸다. 요즘엔 가족건강이나 경제적 여유 같은 속된 기도를 한다. 이 또한 아내의 힘이다. 부처님이 말씀처럼 부부가 같은 종교를 갖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리라. 공(空)이면 어떻고, 색(色)이면 어떠리. 성큼 다가온 가을이 기도의 손끝에 깊다.
시인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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