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밀도, 마음에 스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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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9-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역삼한담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정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시인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9-02 15:29 조회 3,484회본문
장마 끝 무렵, 문학 전문 출판을 하는 시인이 주소 좀 알려달라며 문자를 보내왔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인지라 거기서 새로 낸 시집을 보내주려나 보다 하고는 더 묻지 않고 집주소를 알려주었다.
그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의 해설도 썼기에 가끔 시집을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며칠 후, 춘천에서 복숭아과수원을 하는 시인이 복숭아 한 상자를 보내왔다. ‘아니, 왜?’라는 생각과 함께 당혹스러웠다. 안면이 있기는 하지만 복숭아를 공짜로 받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그보다 피땀 흘려 농사지은 걸 아무 대가 없이 받아먹는 건 염치없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돌려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건 또 성의를 무시한 행위 같아 참으로 난감했다.
그때 복숭아를 보낸 시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택배회사로부터 배달 완료 문자를 받았으리라. 그는 먼저 출판사 친구에게 내 주소를 물어봤다고 했다. “유난히 긴 장마로 복숭아 작황이 안 좋아 힘들 텐데 왜 이런 걸 보내셨냐” 했더니, 내가 전에 “시집을 읽어줘 너무 행복했다”면서 “직접 좋은 것으로 한 알 한 알 골라 담았다”고 했다.
오랫동안 한 신문에 신간 시집 서평을 쓰고 있다. 직접 새로 나온 시집을 골라 쓰는데, 전체에 대한 평과 시 서너 편을 집중 조명한다. 그 시인은 자기 시집을 정성껏 읽어주고 서평을 써준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했다. 그의 시집 서평을 쓰고 달포쯤 지났을 때, 또 다른 시인의 북콘서트 때문에 춘천에 간 적이 있다.
행사 후 자리를 이동할 때 우연히 택시 뒷자리에 같이 탔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요” 하고 말했다. 난 그 의미를 알면서도 “뭐가요?” 하고 되물었다. 그는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시집 서평 써준 거요” 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난 “시가 좋아서 쓴 걸요. 좋은 텍스트를 제공해주셔서 제가 더 고맙지요” 했다. 그리곤 서로 어색해 말없이 목적지까지 갔다.
난 지금껏 ‘세상에는 공짜 없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누군가에게 신세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돈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하긴 누군들 좋아하겠는가. 한번은 일한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아 카드값이 연체될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넉넉잡고 한 열흘 돈을 빌려야만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소규모 사업을 하는 동생이었다. 하지만 바로 생각을 접었다. 가족이기에 더 힘든 형편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다음으로 떠오른 사람이 위에서 언급한 출판사 친구였다. 내가 이야기하면 말없이 돈을 빌려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친구에게 부탁하자는 생각을 굳힌 그때부터 갈등이 시작됐다. 소심한 성격 탓에 전화를 할까 말까 무수히 망설였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한 백 번은 망설인 것 같다. 그냥 전화하면 되는 상황인데도 그게 그리 쉽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 식욕을 잃을 정도였다. 망설이고 있는 내가 너무 한심했고, 괴로웠다. 마음이 지옥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괴로움 없는 이가 어디 있겠나. 방법을 알면서 행하지 못하니 이는 무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알기는 하는데 지혜롭지 못한 것이다. 그게 무지보다 더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카드값 결제일이 돼서야 어렵게 전화로 부탁했다. 그는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냐”며 바로 돈을 송금해줬다. 난 비로소 괴로움에서 해방이 되었다. 물론 예정된 돈이 들어와 바로 갚았다.
복숭아를 받은 그날 저녁, 온 가족이 모여앉아 맛있게 복숭아를 먹었다. 아내는 아이들을 위해 복숭아를 동그랗게 잘라주었다. 양옆을 동그랗게 자르고 남은, 씨에 붙은 부분은 늘 부부의 몫이었다. 복숭아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자 입가에 단물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르 즙이 흘러내렸다.
수밀도(水蜜桃), 고마운 마음이 가슴으로 스며들어왔다.
시인 김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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