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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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8-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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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8-05 12:42 조회 3,732회본문
‘나’ ‘나의 것’ ‘나의 진아’가 아닌 것으로 일어나는 것을 봐야 “바른 견해의 지혜를 일으켜야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생겨”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바른 견해를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수행의 결과도 바른 견해이지만 수행의 시작도 바른 견해입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을 때 수행하는 것이고 바른 견해가 없을 때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견해의 중요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자연의 이치다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복잡한 삶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더라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 들어가면 결국 남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입니다. 이 여섯 가지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여섯 가지의 일어남은 다 자연의 이치입니다. 조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바닥에 손을 대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느끼지 않겠다 라고 해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느끼는 것은 마음입니다. 느끼는 마음이 닿음이라는 조건이 형성되면 느끼는 작용을 자기 스스로 합니다. 나와 아무 상관 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눈을 뜨면 봅니다. 보지 않겠다 라고 노력하더라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는 것은 마음입니다. 볼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 보는 작용을 마음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소리 있으면 듣습니다. 듣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더라도 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리를 듣는 마음은 들을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면 듣는 작용을 나와 상관없이 스스로 합니다. 자연의 이치로 일어난 것입니다.
경전에서도 붓다께서 ‘나’ ‘나의 것’ ‘나의 진아’가 아닌 것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라라고 무수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대상은 대상일 뿐이다
대상은 알아지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등이 다 대상입니다. 눈에 무수한 것이 보입니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모양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양, 색깔은 모두 우리 마음의 해석이라는 것을 앞에서 알아보았습니다. 해석은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는 다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인다는 것으로 동일한 가치를 가집니다. 모양, 색깔 등 각각이 가지는 개별적 가치는 모두 내가 해석하고 부여한 것입니다. 진짜가 아닙니다. 단지 보이는 것이다, 눈의 대상일 뿐이라고 아셔야 합니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다양한 소리, 좋은 소리, 싫은 소리라는 것은 모두 내가 해석하고 가치 부여한 것입니다. 실재가 아닙니다. 실재는 들린다는 사실입니다.
들린다는 것으로서 동일합니다. 대상으로서 모두 동일한 가치를 가집니다. 단지 대상으로 아십시오. 모든 느낌, 모든 냄새, 모든 맛, 모든 생각을 단지 대상으로 아십시오. 단지 감각기관의 대상일 뿐입니다. 알아지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서 항상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수행을 하셔야 합니다. 일어나는 것을 알아가면서 이런 바른 견해를 자주 일깨워주십시오.
그럼 조금씩 왜 자연의 이치인지, 왜 대상인지에 대한 여러분 자신의 이해가 생겨나갈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며 이런 바른 견해는 자연스럽게 여러분의 수행하는 마음에 작용하게 됩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바른 견해가 있게 되면 수행하는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좀 물러난 듯이 느껴지고 부드러워진 듯이 느껴지고 자유로워진 듯이 느껴집니다. 좀 더 객관적으로 대상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를 가지고 보았을 때 좀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는 마음의 조건이 된 것입니다.
깊은 이해는 특별한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있을 때 깊은 이해가 생깁니다. 이렇게 바른 견해의 지혜를 일으킴으로써 수행하는 마음에 지혜가 생기게 됩니다.
수행에 방해되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수행을 하면서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소리, 아픔, 졸림, 생각 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일어나면 수행자는 이것들을 없애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이런 것들에 대해서 바르게 대처하는 것일까요?
좌선을 하는데 소리가 들립니다. 쉽게 소음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시끄러워서 수행할 수 없다고 한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소리 들림은 자연스러운 우리 존재의 활동입니다. 내가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소리는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모두 법의 일어남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대상입니다. 소리가 있으면 소리 있다고 아십시오. 내가 화를 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해해야 할 대상입니다.
아픔도 자연스러운 법의 일어남
그것이 사람의 소리일 때 많은 경우 우리는 화로써 그 소리에 반응합니다. 마음에 화가 일어나면 화가 일어났다고 아십시오. 대상에 대해서 내 마음에 어떤 반응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알아차려야 할 것은 대상에 대해 반응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반응하고 있다고 아셔야 합니다. 좌선을 오래 하게 되면 다리가 아픕니다.
아픔은 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마음은 아픔을 압니다. 싫어하는 마음으로, 없애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압니다. 아픔을 보면서 마음은 아픔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은 바른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대상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는 것은 모두 바른 수행의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상을 바꾸고자 하지 않습니다. 단지 바르게 보고자 할 뿐입니다. 아픔도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법의 일어남입니다. 있으면 있다고 아셔야 합니다.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보지 마십시오. 우리는 아픔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단지 아픔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단지 지켜볼 뿐입니다.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 자연의 이치다.’라는 바른 견해를 가지고 아픔이 있음을 가볍게 알아 가십시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물론 그렇게 지켜보다가 아픔이 너무 커져서 더 이상 바르게 지켜볼 수가 없으면 자세를 바꾸어주십시오. 자세를 바꾸어주면서 계속 알아차림을 하신다면 아주 바르게 수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힘이 좋아지면 아픔이 크더라도 무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좌선을 하게 되면 쉽게 마음이 멍하게 되면서 졸립니다. 조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조는 마음의 작용도 마음의 여러 작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졸리면 졸린다 라고 아십시오. 나쁜 것이다, 없어져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알아야 할 것이다, 이해해야 할 것이다 라고 아셔야 합니다. 조는 마음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 이렇게 졸림을 알아차려도 마음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일어나서 걸으십시오. 자세를 바꾸기 전에 항상 그 대상을 바르게 보려는 노력을 먼저 해 보셔야 합니다.
수행 중에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흔히들 망상이라고 부르면서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그릇된 마음가짐입니다. 생각은 우리의 존재의 진행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생각도 없어져야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을 하면 생각한다 라고 아십시오. 알 수 있는 만큼 생각할 때마다 생각한다 라고 아십시오.
처음에는 생각이 완전히 끝이 나고 나서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아십시오. 그렇게 계속 알 수 있는 만큼 알아 가시다 보면 조금씩 생각하면서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능숙해지면 생각한다고 알면서 생각을 계속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알면서 생각을 하게 되면 생각이 우리에게 크게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알면 아는 만큼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이 외에도 수행 중에 부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이 일어납니다.
화가 날 수도 있고, 초조할 수도 있고, 두려울 수도 있고, 머리가 멍할 수도 있고, 몸이 무거울 수도 있습니다. 일어나는 것이 무엇이든 수행에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우리 존재의 진행의 한 단면이고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조건 되어 일어나는 법의 일어남입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없애야 할 것이 아닙니다. 있으면 있다고 알면 됩니다. 단지 그런 것을 알면서 ‘자연의 이치다’ ‘대상이다’란 바른 견해만 일으켜 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것들까지도 모두 수행의 대상이란 것을 이해하시게 되면 수행하지 못할 시간과 상황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게 되면 언제나 수행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특정 시간과 장소에서 특정 목적을 얻기 위해서 하는 특별한 활동이 아닙니다. 붓다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하신 삶의 방식입니다. 붓다께서는 우리에게 ‘알면서 살아라.’ 라고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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