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질고 외롭게 싸워 광복의 불씨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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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08-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8.15 광복 기획특집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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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8-05 13:12 조회 4,088회본문
밀양 백산에서 촬영한 원정 대성사님의 가족 사진 (1933~1934년 추정), 뒷줄 맨 왼쪽 원정 대성사님, 가운데 부친 손기현 님
원정 대성사 부친 손기현, 2016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서간도 망명 독립단 활동, 홍범도 장군과 봉오동 전투 승리
우리는 위대한 이들이 남긴 빛의 흔적을 뒤쫓아 간다. 원정 대성사의 행장 중 일제 침탈로 나라와 민족이 빛을 잃었던 시기의 일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의 등불이 꺼졌던 시절 민족을 반역한 이도 있고, 모질고 외롭게 싸워 광복의 불씨가 된 이도 있었다. 대성사의 가족사는 역사 앞에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를 깊이 돌아보게 한다. 성사께서 진호국가불공(縝護國家佛供)을 시작한 뜻을 성사의 행장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대성사가 탄생하신 1907년은 조선의 국운이 꺼져가던 시절이다. 성사의 부친 손기현(孫基賢, 1883~1942)님은 망국의 유감을 곱씹으며 당시 의병과 지사들이 나섰던 길을 뒤 따라갔다. 조상 대대로 번성하던 밀양 다죽리의 재산을 모두 처분한 후 이제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성사님 형제를 앞세워 망명의 길을 떠났다.
소달구지 하나에 가산을 모두 싣고 부부와 어린 두 아들이 함경도 초산까지 몇 달이 걸리는 길고 먼 고통의 행로를 걸어갔다. 여느 망명객들이 그렇듯 어두운 밤 달빛을 호롱불 삼아 압록강을 건너 자리 잡은 곳은 서간도 환인현 남관(桓仁縣 南關)이란 곳이다.
환인현은 당시의 봉천성,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시(瀋陽市) 인근으로 옛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이 있던 곳이다. 일제를 피해 망명객들이 모여들어 서간도 독립운동의 본거지가 됐는데,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고 당시 상해임시정부 아래 조직된 서로군정서의 거점지역이다.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 다수도 서간도 일대에 정착했고 대성사 가족도 그곳에 자리를 잡게 된다.
대성사 가족은 농사지을 땅을 얻어 옥수수밭을 일구고, 콩이며 조, 감자 따위를 심어 거친 끼니나마 채울 수 있었다. 역사와 민족과 개인 모두가 모진 세월을 견뎌야 했던 시절이다. 돌을 나르고 물을 끌어들여 황무지를 개간해 논과 밭을 만드는 와중에도 지사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쳤다.
숨어서 무기를 사들이고 힘을 기르던 간도 땅 대한국인들 사이에 불꽃을 당긴 사건이 벌어졌는데 1919년 3.1운동이다. 그해 3월 12일 서간도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돼 며칠 동안 일대의 동포들이 시위에 나섰다.
독립신문 봉오동 승전 기사 (1920년 6월 22일) <자료출처=독립기념관>
그리고 이듬해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 휘하의 독립군이 봉오동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이 사건은 독립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질렀지만, 한편 일본제국군의 집요한 토벌 작전으로 이어졌다.
대성사의 부친은 상해임시정부와 연관된 환인현 한교공회(韓僑公會) 외교원 신분으로 독립군을 위해 무기조달을 하고 있었다.
대성사의 집은 독립군 회합 장소가 됐고, 어린 대성사는 그들을 위해 즐겨 심부름을 했다. 늦은 밤까지 독립군들이 모여 뜻을 모색하고 결의를 다졌으며 작전 회의를 하던 모습을 대성사는 고스란히 지켜보고 기억했다. 대성사의 모친은 동지들을 위해 조밥과 감자나마 배불리 차려 내놓았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후 일제는 서간도 일대 독립 세력을 집요하게 추적하였는데 대성사의 부친도 오랜 감시 끝에 1920년 10월 체포돼 만주 일본 안동 영사관으로 압송돼 재판에 넘겨졌다. 독립단 활동의 죄목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는다.
당시 일본 밀정의 비밀보고서에는 홍범도 장군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됐고, 함께 체포된 90여 명의 일행 중 세 번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독립군의 무기로 조달된 것이 권총과 소총 기관총 등 수백 정에 이른다고 보고됐고, 체포 당시 압수된 총기류와 독립군복, 기타 물자 등도 상당한 규모였다. 대성사의 부친은 그 핵심 인물로 체포된 것이다. 체포 당시의 정황은 대성사님 여동생의 증언을 통해 남아있다. 아침나절 일본헌병대 무리가 집으로 들이닥쳐 조선독립군을 보았냐고 다그치자 부인한다.
대성사님의 부친과 형이 곧바로 헌병대로 끌려갔는데, 심문과 함께 가혹한 고문이 시작됐다. 손톱 밑에 바늘을 꽂고, 손가락 마디마디는 집게로 집어 비틀었다. 거꾸로 매달아 구타를 했고, 코에는 소금물을 들이부었다. 부친은 다시 압송돼 재판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형은 모진 고문 끝에 보름 만에 석방됐으나 평생의 병을 얻게 된다. 집안에 성한 남자는 오직 대성사님 하나뿐으로 어린 탓에 겨우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 곡절을 겪고 아픈 몸으로 돌아온 큰아들과 대성사님은 독립군에 합류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부친이 떠난 자리를 지키던 어머니가 간곡히 만류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성사의 모친은 불심이 깊어 늘 정화수를 떠놓고 남편과 함께 잡힌 이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살아있는 것은 미물조차 해치지 말라 하여 눈에 띄면 종이로 싸서 치우고 자식들에게도 그리하도록 가르쳤다 한다.
옥고를 마친 후에도 일본군의 압박은 그치지 않았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독립전쟁 이후에도 간도 땅 일대의 독립운동은 기세를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성사님 가족에게 찍힌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낙인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이후에도 체포된 독립운동가의 재판에서 대성사님의 부친은 그의 혐의를 부정하는 증언을 한다. 체포된 이는 결국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임을 밝혀 명을 구할 수 있었다. 한 생명이 용기 있는 증언에 의해 살아난 것이다.
사사건건 일제에 협조하지 않던 대성사님 가족의 생계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농사도 여의치 않고, 일제와 밀정은 감시와 압박을 늦추지 않았으니 애써 망명한 땅에서 살아갈 방도를 잃었다. 친일은 삼대가 부자로 살고, 항일은 삼대가 고초를 겪는다는 말은 공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은 큰 뜻을 세워 망명길에 나섰던 먼 길을, 하염없이 걸어서 되돌아오게 된다. 이제는 여비조차 없어 주변에서 한 푼 두 푼을 모아 겨우겨우 고향에 올 수 있었다. 대성사님 가족의 고초는 2016년에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에 의해 광복된 나라의 위로를 받았다.
소인은 소아(小我)에 집착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살고, 대인은 중생을 대아(大我)로 삼아 보살의 길을 걸어간다. 대성사님이 진호국가불공을 가르치고 나라와 중생의 영토를 위해 불공을 행한 것도, 암흑의 시절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부친을 지켜보고 독립군들을 위해 주전자라도 들어 나르는 일에 힘을 보탠 숙업의 인과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 기억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남겨진 교훈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민족의 광복(光復)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역사의 빛을 다시 밝히는 일이고, 밀교 수행자의 광복은 끝없이 서원하고 불공을 그치지 않아 무명에 덮인 마음의 빛을 되찾는 일일 것이다.
어린 시절의 대성사께서는 조국 광복에 작은 빛이 나마 더했고, 창종으로 말법시대 세상에 마음의 빛을 되 밝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지금 이 순간 누구나 무명으로부터 광복의 길을 걸어야 한다.
작가 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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