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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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2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1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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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11-05 13:20 조회 2,999회본문
‘아는작용’은 어떤 모양, 위치, 크기로 관념화해 설명할 수 없는 것
‘나’란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경전에서 붓다께서는 문혜, 사혜, 수혜를 말씀하십니다.
문혜는 들어서, 읽어서 아는 지혜입니다.
사혜는 생각해서 이해한 지혜입니다.
수혜는 수행을 통해서 직접적으로 통찰한 것입니다.
많이 읽고, 많이 듣고, 수행해야
여러분은 많이 읽고 많이 들어야 합니다. 많이 알아야 수행을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행의 정보는 여러분의 수행하는 마음에 자연스럽게 작용합니다. 경전의 경우는 어느 것이나 붓다께서 직접 설한 경전을 읽으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과 관련된 정보는 선택해서 취하셔야 합니다. 붓다께서 빠리닙바나(반열반(般涅槃, parinibbana)에 드신 지가 2,500년이 되었습니다. 비구승가가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전승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여러 가지 오류가 생긴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붓다 사후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왔고 그 해석에 따른 다양한 수행법들이 행해졌습니다. 지금도 미얀마 등지에 가보면 여러 스승들이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방법의 수행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상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방법들이 ‘그 가는 길은 설령 다르더라도 도착점은 같을 것이다.’라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스승들은 다양한 방법을 가르치고 계시고 서로 다른 결과를 이야기하십니다.
수행에서 생각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풍토가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7가지 길 가운데 하나가 법에 대한 ‘조사’입니다. 법과 수행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셔야 하고 그 생각을 통해서 사유로써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수행을 시작하면서 수행에 대한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얻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은 스스로 그 정보들을 생각을 통해서 소화시키려 합니다. 수행 초기에 앉거나 걸으면서 마음이 알아서 수행과 법에 대해서 계속적으로 생각을 진행시켜 나가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생각을 통해서 생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알고자하는 에너지로 남아있게 됩니다. 이러한 생각의 내용들에 대해서 직접 수행을 통해서 실재로 이해하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고자 하는 마음의 에너지가 약해집니다. 알고자 하는 에너지는 알아차림의 과정에서 새로운 이해가 생길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아는가?’라고 물으며 마음을 확인
수행에 대한 바른 정보가 있고 그것을 생각으로 이해하고서 실재하는 몸과 마음의 일어남을 알아차림 해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수혜’가 생겨납니다. ‘수혜’를 ‘통찰지’라고도 부릅니다. ‘통찰지’는 실재하는 것에 대한 이해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에는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대상을 가볍게 봐 나갑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상으로부터 마음이 조금씩 멀어집니다.
이렇게 대상으로부터 수행하는 마음이 멀어지면 한 순간 여러 개의 대상을 한꺼번에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개의 대상을 한꺼번에 알 수 있을 때 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는 작용은 어떤 모양, 위치, 크기로 관념화시켜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이해할 수 있는 실재하는 법, 빠라마타(paramattha)입니다. 안다는 것이 이해되면 자주 자주 ‘아는가?’라고 물으면서 아는 마음을 확인합니다.
마음의 힘이 좋고 균형이 맞아야
‘수혜’는 두 가지 패턴으로 생겨납니다. 실재하는 법을 계속해서 알아차림 하게 되면 조금씩 마음에 실재하는 법에 대한 이해가 생깁니다. 처음에는 이해가 생기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상당시간이 지난 뒤에 ‘내게 이런 이해가 생겼다.’ 라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경우는 마음의 조건이 아주 좋을 때입니다. 좋은 마음의 힘이 아주 좋고 마음의 균형이 맞을 때 한 순간 폭발적인 이해가 생기게 됩니다.
예를 든다면 화를 지켜보면서 ‘화가 단지 마음이구나.’ 라는 이해가 한 순간 마음에 ‘확’ 알아집니다. 이런 이해가 생겼을 때 내가 이 지혜의 내용에 대해서 100%안다고 스스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온통 지혜로 충만하게 됩니다. 그 순간 마음에 번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혜가 난 순간 마음은 전혀 다른 차원의 상태로 바뀌어 집니다. 아주 깨끗하고 밝고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아는 마음을 대상으로 계속적으로 알아차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아는 마음, 실재하는 법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갑니다. 하나의 대상을 알 때도 그 아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이해가 생깁니다. 고정된 것 같은 벽을 보면서도 그 벽을 바라보고 있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마음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무상’에 대한 이해입니다. 보는 마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면 보이고 있는 대상의 직용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이해하면 자연스럽게 대상을 이해합니다. 손바닥을 서로 문지르면 느낌의 변화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주먹을 쥐고 있으면 느낌의 변화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안다는 것을 계속 알아가게 되면 그런 경우에도 느끼는 마음의 끊임없는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새싹은 무상하지 않습니다.”
새싹이 무상합니까? 새싹은 무상하지 않습니다. 새싹은 관념이고 관념은 불변합니다. 그럼 그 때 무엇이 무상입니까? 새싹이 계속 끊임없이 보이고 있다는 것이 무상합니다. 흔히들 시간의 경과 안에서 무상을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무상은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이 아닙니다.
불교의 진리는 오직 실재하는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상도 이 순간의 무상을 말하고 찰나의 무상을 이야기합니다.
현재 이 순간 인식의 진행과정에서 각각의 역할을 하는 실재하는 작용들이 무상한 것입니다. 눈과 보이는 것의 작용, 귀와 들리는 것의 작용, 느낌과 느낌 아는 것의 작용 등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내 존재가 한 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무상’에 대한 이해가 생기면 이런 이해는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수행하는 마음의 바른 견해가 됩니다. ‘무상하다’란 시각으로 일어나는 것을 알아차림 해 나갑니다. 이렇게 알아차림 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이러한 일어남의 진행에 ‘나는 그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하는구나.’라는 이해가 마음에 분명해집니다. 일어나는 것은 나와 상관없이 자신들의 원인과 조건에 의해서 자신들의 작용을 스스로 해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눈은 보고 귀는 듣고 마음은 생각한다는 이해가 생깁니다. 이것이 ‘무아’에 대한 이해입니다.
일어나는 것들이 나의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어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끊임없이 알아차림이 됩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알아차림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 이러한 일어남이 계속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존재가 계속되는 것은 원할 바가 아니다.’란 것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것이 ‘고’에 대한 이해입니다. ‘고’에 대한 이해가 다른 지혜보다 더 수승한 ‘지혜’인 것 같습니다. 붓다도 경전 여러 부분에서 ‘고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수행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돌아가신 쉐우민 사야도께서는 ‘존재의 고를 완전히 이해했을 때 진정 마음은 열반을 향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존재에 대한 집착이 있는 우리가 ‘고’에 대한 지혜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음호에서는 저의 경우를 통해서 ‘고’에 대한 이해가 무엇인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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