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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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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0-10-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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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10-12 10:21 조회 3,15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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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5>
미래 수행의 완성을 위해 현재의 수행은 말아야, 앎과 믿음은 연결... 바른 수행으로 균형을 이뤄

좋은 마음이란?


수행을 가장 광범위하게 정의한다면 좋은 마음을 기르기 위한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다양한 좋은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4여의족, 5근, 5력, 7각지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합니다. 이 마음들을 좋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마음이 있을 때 마음에 좋은 느낌이 생겨나고 우리가 행복해지기 때문입니다. 수행에서는 주로 5력으로 좋은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신심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마음은 굳건해집니다. 마음에 확신이 생기면서 좋은 느낌을 가져옵니다. 모든 종교에서 이런 믿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 사람 신심이 좋다’라고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종교인으로써 칭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는 이것과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 수행에서 좋은 마음이라는 것은 균형을 이룬 마음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의 균형이 맞을 때 더 깊은 이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심은 지혜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지혜는 아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고서 믿을 때 바른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믿는 맹목적 믿음을 우리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합니다.


 깔라마경에는 믿음에 대한 붓다의 독특한 가르침이 실려 있습니다. 케사풋타에 사는 칼라마 사람들이 그 곳을 방문한 붓다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붓다여! 많은 수행자들이 케사풋타에 옵니다. 와서는 자신들의 가르침을 이야기하고 다른 이의 가르침을 비난합니다. 다시 다른 수행자가 와서 먼저 온 수행자의 가르침을 비난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해 혼란스럽습니다. 붓다께서 이 문제를 좀 해결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으시고 붓다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전승되어온 가르침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마라. 경전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마라.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그럴 것이다 생각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마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너의 스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마라. 그럼 어떤 것을 믿어야 하는가? 그것을 너 스스로 취해서 행해보고 그것이 너에게 행복과 복됨을 가져온다고 스스로 분명하게 알았을 때 그것을 믿어라.” 


‘알고서 믿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믿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알면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무엇이 무엇이라고 알면 무엇이 무엇이라고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알면 믿음의 마음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아는 것이 원인이 되어서 믿음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렇게 앎과 믿음은 연결되어 있고 수행을 바르게 하면 자연스럽게 두 가지 마음이 균형을 이루며 함께 힘을 키워가게 됩니다. 


새로운 종교가 처음 태동할 때는 언제나 기존의 가치, 사회 환경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면서 나타납니다. 자신들의 이상을 가지고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개인적으로 노력합니다. 아주 진취적이고 활동적이며 자기실현적입니다. 그 종교가 개인의 삶을 좀 더 행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면 자연스럽게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종교를 따르고 그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향상시켜나갑니다. 

그렇게 그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교단이 커지게 되면 처음 가졌던 가치를 가지고는 교단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각자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이상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룰 때 그 무리 안에는 많은 주장과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조직이 커지게 되고 초기에 가졌던 자유주의적 경향이 교단을 불안정하게 만들면 교단을 이끄는 사람들이 그 종교가 가지고 있는 여러 좋은 가치들 가운데 ‘믿음’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스스로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단지 믿기만 하면 된다’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문제를 진취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길을 버리고 점점 믿고 따르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믿는 사람은 따르는 사람이고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루기가 아주 쉽습니다. 쉽게 지배되는 피지배인이 됩니다. 진취적이고 자기실현적 가치가 중시되던 종교 초기에는 대체로 정치권력이 이런 종교를 탄압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길을 스스로 가는 사람들은 지배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종교가 커지고 믿음이 그 종교의 우선적 가치가 되면 정치권력이 그 종교를 지원합니다.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지배하기 쉬운 사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어리석음의 경향을 보이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믿지 마십시오. 믿음은 붓다의 가르침에서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는 ‘믿어라’ 말씀하시기보다 ‘의심해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알지 못하는 것을 알기위해서 관찰하고 조사하고 의심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통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이해했을 때 믿음은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이렇게 알고서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노력


우리는 삶을 살면서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정한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부단히 애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노력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삶에서 우리가 하는 노력을 바른 노력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삶에서 우리가 무엇을 위해 노력할 때 그 노력의 기본적 에너지가 욕심이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나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우리에게 괴로움을 줍니다. 욕심으로 노력하기 때문에 삶에서 무엇을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그 노력의 과정은 괴롭습니다. ‘노력의 과정은 괴롭지만 결과만 이루고 나면 나는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는 환상을 가지고 지금의 괴로움을 정당화시킵니다. 


 수행도 이런 태도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행하는 지금은 설령 괴롭더라도 수행을 다 이루고 나면 나는 진정 행복해질 것이다’는 환상을 가지고 수행합니다. 

그릇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괴로우면 괴로움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지금 이 순간만 존재하는 존재입니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환상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고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시간도 지금 이 순간이고 수행이 완성되는 것도 지금 이 순간입니다. 

우리는 미래의 수행의 완성을 위해서 수행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바르게 수행하고자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을 바르게 바라보고자 합니다. 지금 바르게 수행하는 것, 지금 바르게 사는 것 그것이 우리 수행의 목적입니다. 미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수행하지 마십시오. 지금 단지 수행하려고 하십시오. 

지금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바른 견해를 일으키면서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있다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수행은 여러분의 지혜의 수준에서 지금 이 순간 완성된 것입니다. 


“붓다는 어떻게 이 고통의 강물을 건넜습니까?” 

붓다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강물을 건너면서 중간에 멈추지도 않았고, 애써 강물을 헤쳐 나가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럼으로써 나는 이 고통의 강물을 건넜다.”


중간에 멈추는 것은 수행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고 애써 강물을 헤쳐 나가려는 것은 욕심으로 수행하는 노력을 말합니다. 

붓다는 이 두 극단을 버리시고 중도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너무 애써서 수행하지 마십시오. 저의 스승께서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한국인이 수행을 열심히 한다고 하면 겁이 난다. 모두 욕심으로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수행을 해서 차라리 수행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한 마음의 상태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욕심으로 인한 과도한 노력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것은 단지 바른 견해를 일으키고 알아차림을 이어지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도경스님의 수행법문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연재 제목을 이번호부터 ‘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로 변경합니다. 또 지난 250호 ‘심념처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3>’에서 <4>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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