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덕을 베풀되 과보를 바라지 마라
페이지 정보
호수 296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7-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왕생법문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7-08 13:34 조회 550회본문
『보왕삼매경론』에 “공덕을 베풀되 과보를 바라지 마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 가르침의 내용을 파악하는 일은 쉬울지 몰라도, 그렇게 실천하고 살아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들은 무엇을 베풀면 꼭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이나 보답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세상살이의 보편적인 관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누구나 알다시피 자비정신을 근본으로 표방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타인을 향한 베풂을 원시경전이나 대승경전을 막론하고 강조하고 있으며, 일체 베푸는 행위 자체가 커다란 공덕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체 모든 종류의 베풂을 보시라고 하는데 이 보시에는 크게 물질을 베풀어주는 재보시, 불법을 가르쳐 주어 바른 길을 걷도록 도와주는 법보시, 삶에 두려움이나 공포에 떨고 있는 이에게 위로와 용기를 불어넣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외시가 있습니다.
『열반경』에 “보살은 보시를 행할 때 모든 사람에 대해 자비심을 평등이 지녀서 마치 자식같이 생각한다. 또 보시를 행할 때 모든 사람에 대해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부모가 병든 자식을 돌보는 것같이 한다. 또 보시할 때 그 마음에 기뻐하여 부모가 그 자식의 병이 완쾌한 모양을 보는 것같이 한다. 그리고 보시를 끝낸 뒤에는 그 마음을 너그럽고 고요하게 해서 부모가 그 자식이 커서 자유롭게 살아감을 보는 것같이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베풀 때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보시를 행하면서 상대방을 향한 자비와 진정한 연민의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아만심과 남을 도와주었다는 교만한 마음으로 행한다면 진정한 보시가 아닌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선행을 행하고도 그것을 자랑하거나 과보를 바라지 않는 마음, 즉 아무 조건도 바라는 것이 없이 베푸는 것, 마치 하늘의 태양이 모든 만물에게 무량한 빛과 에너지를 무한정으로 주지만 그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나, 공기와 물 등 자연이 인간에게 끝없는 혜택을 베풀면서도 그 은혜에 상응한 보수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무진장한 은혜를 베풀면서도 결코 자신에게 돌아올 이익을 바라지 않는 무주상보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푼 사람도 받는 사람도 베푼 물건에 대한 일체 관념에서 벗어난 보시, 마치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이 하는 보시야말로 참다운 보시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무주상보시를 바로 행할 수 있을까요?
우선 아상을 먼저 버려야 되는것입니다. 나라는 생각, 내가 했다는 생각을 버리 지 않고서는 결코 무주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상이란 이기적이고 배타적이고 자기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 사고에 물든 마음이기 때문에 참다운 이타행인 무주상보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다운 자비행, 참다운 무주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허공처럼 바다처럼 비우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참된 자비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한 몸으로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베푸는 자가 없고 베풂을 받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이 동체라는 생각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중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재물과 법을 베풀어서 나와 중생의 마음 밑바닥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간탐심을 보리심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 바로 참된 자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주상보시 정신은 동체대비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동체대비! 그것은 한 몸의 사랑으로 내가 나에게 주듯이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보시이기에 여기에는 주는 사람 받는 사람 주고받는 물건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주었지, 많은 공덕이 있을 거야’ 이러한 자랑 섞인 보시는 자비보시가 아닙니다. 아직은 모자람이 있는 보시입니다.
보시가 해탈과 직결되려면 서로 동체라는 인식 아래 평등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내가 너에게...’라는 상대적인 생각이나 ‘내가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베푼다.’는 생각 을 갖고 있다면 온전한 해탈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보시는 평등한 마음에 그 바탕을 두어야 합니다. 오직 평등한 마음,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법계 속에 살고 있는 미래에 부처가 될 존재들끼리 기꺼이 나누어 살고자 하는 마음, 만일 이렇게 평등심을 유지하여 보시를 한 다면 부처님의 평등성지를 얻어 능히 해탈할 수 있으며 이야말로 참된 보시바라밀의 완성 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이 사는 사바세계란 상대적인 가치가 항존하는 세상이므로 중생이 응당 상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생은 언제나 베푼 만큼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덕을 베풀면 보답을 바라게 되고, 그 베푼덕이 가져다 줄 이익을 계산해 보고, 뻔뻔스럽게도 베푼 것 이상의 이익이나 명예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바로 중생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볼 때 베푼 것에 대한 보답을 기대하는 자체가 거래이지 실제로 베푼 것이 아닙니다.
보시의 근본정신은 우리 중생의 마음에 숨어 있는 탐욕과 인색함을 물리치고 만족할 줄 아는 지족의 마음과 자비의 성품을 길러 덕을 기르는데 그 근본이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공덕을 회향하는 마음가짐입니다.
회향이란 겨자씨만한 공덕일지라도 그 공덕을 상대에게 돌리는 정신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공덕을 짓도록 해준 상대방에게 그 공덕을 돌리거나 부처님의 자비정신에 공덕을 돌리는 마음입니다. 이런 회향하는 마음이 있다면 결코 자신이 지은 선행을 자랑하거나 교만해지는 일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밀행과 회향하는 마음가짐으로 선행의 공덕 을 실천할 때 그것이야말로 진리의 바른 실천임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