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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일발(一衣一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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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2-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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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니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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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2-04 13:22 조회 2,9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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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일발(一衣一鉢)
정인 양 사건, 교회 안 코로나19는 엇나간 신앙, 불법은 탐욕 시대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등대’

국가가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것은 국가 성립의 목적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 시대 동서대비원은 백성들에게 의료 혜택을 베풀기 위해 세운 기관으로 원(院)이라는 명칭에서 사찰에서 운영했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찰은 보육원의 역할도 했는데, 고려 시대는 물론이고 불교를 탄압했던 조선 시대에도 사찰이 천민이나 고아, 병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의 의지처 역할을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6.25 전쟁 중에 전쟁고아를 돌본 기관이 교회에서 운영한 시설 이외에도 사찰에서 사적으로 고아들을 돌본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입양은 ‘가슴으로 낳은 자식’, ‘낳은 정보다 기른 정’으로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지 말라’는 부정적인 말이 같이 떠돌아다닙니다. 장애가 있는 아이의 입양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기에 자기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교적 믿음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는 행위로 입양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얼마 전 양부모 학대로 생후 16개월 만에 사망한 '정인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양부모는 모두 기독교 목회자의 자녀들이었다고 합니다. 성직자의 자녀들이었기에 입양을 자신이 신앙하는 종교적 실천으로 생각했지만, 정작 입양한 이후 양육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정인 양을 학대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인 양의 양부모가 기독교 목회자의 자녀들이라는 점과 최근 코로나19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녀본 사람들은 대부분 느끼지만 교회가 ‘물질적 충만’이나 ‘사회적 성공’을 중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끊임없는 확장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자본주의적 기업과 닮았다는 인상을 쉽게 느끼는 경우가 많죠.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제정일치의 전통 아래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 국가 권력을 넘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원조를 받은 독일, 일본, 한국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독일은 공장을 짓고, 일본은 관공서를 짓고, 한국은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해방 당시 미 군정은 한국을 통치하는데 협조자로 기독교 신자를 우선했고 이승만 정권 이래로 뛰어난 인재들에게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이들이 한국의 고위관료로 전문직 종사자로 종사하면서 상류층을 형성하였고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의 카르텔을 형성했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가 끊임없이 몸집을 키우는 과정에서 욕망의 충족을 정당화했고 부추겼으며 교회는 이러한 성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소로 기능하기도 하면서 쇼윈도우적 삶을 신자들에게 퍼트렸지요. 정인이의 양부모도 입양을 기독교적 사랑을 보여주는 수단으로 여겼기에 파양하는 것은 자신들의 위신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그들이 한 TV에 나와 입양한 가족 모습을 보여주었던 행위는 한 어린 생명을 자신의 종교적 과시욕으로 희생시킨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신천지 교회나 상주 열방 센터처럼 대면 예배라는 종교적 원칙을 다른 사회 구성원의 건강보다 우선시했던 것도 좁디좁은 자기만의 시야에 갇혀 저지른 반사회적이고 반 공동체적 행위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자기중심적인 행위들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있는 걸까요? 

불교 신자들도 절에서 기도를 통해 무언가를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는 측면에서 기독교 신자들과 별다름이 없습니다. 이는 종교의 가장 근본적인 기능이지만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복을 비는 행위를 용인하는 한편으로 ‘비움’ 나아가서 보다 적극적인 ‘맑은 가난(청빈, 淸貧)’을 강조합니다. 한 벌의 옷과 하나의 발우(일의일발, 一衣一鉢)의 삶을 꾸려가는 승가는 탐욕의 시대에 올바른 길을 제시하는 등대입니다. 탐욕은 갈애(渴愛)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용어로 갈급(渴急)이란 말이 있는데, 불교와 달리 매우 긍정적인 용어로 사용되지요. 인간이 욕망을 충족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21세기의 현재는 과도한 충족으로 인한 낭비나 탐욕이 아니라 절제가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불교의 교리는 마치 현재의 인류가 저지른 탐욕의 결과를 예견하고 설해진 듯 보입니다. 2,500여 년 전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래된 미래’입니다.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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