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 밀교전법의 가교, 바이로짜나바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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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3-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정성준 교수의 밀교 인물史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교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3-05 14:20 조회 2,901회본문
인도사상사에서 불교는 석존시대부터 나란다대승원(마하비하라)이 존속한 14세기 전후까지 약 2천여 년의 시간에 이른다.
밀교가 차지하는 시간은 진언경, 다라니경이 출현한 4세기 전후를 출발점으로 본다면 밀교는 인도불교사에서 무려 천여 년 간 존속한 성공적인 이론과 수법 체계를 보인 것이라 평가된다. 인도 후기밀교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서구 불교계에 의해서이다. 후기밀교의 많은 부분들이 「금강정경」에 의해 대부분의 기초가 마련되었기 때문에 「금강정경」의 산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금강정경」을 연구하려면 인도의 붓다구히야, 샤꺄미뜨라, 아난다가르바와에 의한 방대한 세 주석의 번역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 번역을 위해서는 인연 있는 인물이 나서서 밀교를 전공하여 산스크리트, 티벳어, 한문, 일어, 영어, 심지어 우리말에 대한 문법학 연구 등에 평생을 바쳐야 한다.
밀교 인물사에 소개하는 많은 인물들이 왕족 출신인 사실은 이들이 교학연구와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에서 수학기간을 보내고 역경, 전법의 불사에 전념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여기서 소개하는 바이로짜나바즈라(Vairocanavajra, 12세기)도 예외가 아니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인도 중동부 오릿사 지역에 해당하는 남코샬라의 소마나쓰뿌리에서 사챠나(라자세나라고도 한다) 왕가에 태어났다. 수학기를 마친 후 서인도와 북인도를 여행하다가 나란다승원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서기관 출신의 스라뻴라라고 하는 서기관 카스트의 요기를 만나 8년간 배웠다. 스라뻴라가 제자들의 마정수기(摩頂授記)를 내릴 때는 그가 제자의 이마에서 손을 떼기 전까지 제자들은 깊은 무의식 상태를 오래도록 체험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스승으로부터 배운 후 유명해져 훗날 티베트와 중국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된다. 또한 도하 문학에 뛰어나 방대하고 난해한 불법을 간결한 시가(詩歌)로 전달할 수 있었으며 많은 밀교의 비법에 능통하였고, 심지어 원예조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인도본토를 유람하며 밀교를 전할 때 외도를 숭배하는 왕을 만나 불에 던져졌으나 몸을 상하지 않는 이적을 보였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티베트와 깊은 관계를 맺고 바리출신 역경사 린첸닥 (1040~1112년)과 인도불전의 티벳어 역경에 참여했으며 티베트를 다섯 차례 방문하여 향후 티베트불교와 정치를 이끌 인물들을 무수히 길러냈다. 티베트에서는 바이로짜나바즈라 대신에 가끔 바이로짜나락시따로 더 알려졌지만 바이로짜나락시따는 8세기 활동한 티베트의 역경사와 혼동한 것이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티베트의 여러 지역을 방문했지만 특히 라사 북쪽의 펜율에서 끼롱사원을 세우고 역경과 지도에 전념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상유닥빠(1123~1193년)는 스승의 전기를 기록하면서 행실이 검소하고 먹을 것을 가리지 않았으며 제자가 되려는 이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대하듯 스스럼없이 막지 않았고, 부드러운 말로 가르치고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하였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티베트불교의 까규전통 가운데 모계의 전승자이기도 하며 사하자야나의 전승조사로 여겨지며, 현재 그의 주석이 티베트불교 논소부에 전해지고 있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티벳어에 능통하여 역경할 때 번역자를 따로 두지 않았지만 작업에 동참한 자로 랜달마로되로 알려진 역경사가 있었다.
바이로짜나바즈라는 송대로 추정되는 시기에 중국도 방문하여 오대산을 참배한 기록도 전해진다.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지역의 통치자가 의심하여 창과 화살로 공격하였는데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황제는 알 수 없지만 왕족과 귀족이 모인 정원 앞에서 수은 한 컵을 들이키는 이적을 보였는데, 당시 남인도의 술사들은 장수와 양생에 관심이 많은 왕실 귀족들에게 큰 대우를 받았고, 이들의 지식 상당 부분이 중국도교의 양생술에 전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원래 수은은 맹독성 중금속이기 때문에 한 컵을 마시면 죽음에 이르지만 바이로짜나바즈라는 이를 중화하는 비책을 알고 있어 장수를 맹신하는 왕족이나 귀족들을 교화하는 방편으로 비술을 보인 것이라 생각된다. 이외 몸을 바꾸어 보이는 신변이나 은신술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바이로짜나바즈라의 이적은 한편으로는 독이 되어 중국 황실에서 그를 아껴 거주의 자유를 빼앗아 한때 감금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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