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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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3-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도경스님의 수행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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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3-05 14:14 조회 2,862회본문
번뇌는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 부처님은 기본적인 물질로 흙, 불, 물, 바람의 요소로 설명
지혜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한 번 봅시다.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입니다. 그 아이 앞에 촛불이 켜져 있습니다. 아이에게 촛불에 손을 대보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촛불에 손을 대었습니다. 뜨거워서 울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촛불에 손을 대면 ‘아프다’라는 확실한 지혜가 생겼습니다. 이런 지혜가 있는 그 아이에게 다음에 다시 촛불에 손을 대고 싶다는 생각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손을 대면 아프다 라는 이해가 손을 대고 싶다란 생각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번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번뇌를 받아드리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한 지혜가 스스로 자신의 작용을 하면서 번뇌를 줄일 것입니다. 수행은 지혜가 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지혜가 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오온(五蘊)
붓다는 우리 존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십니다. 5가지 무더기,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일어남 등으로 설명하시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붓다가 사용하는 방법은 다섯 가지를 무더기로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붓다께서 우리 존재를 이렇게 5가지로 해체해서 설명하시는 것은 나라고 하는 관념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붓다께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존재를 설명하셨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붓다는 불변하는 진리를 세상에 펴고자 하신 분이 아닙니다. 붓다는 우리 존재의 문제, 고통을 직시하셨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붓다가 하고자 하신 말씀도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행을 길을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붓다는 존재와 세상을 해석하면서 고통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패턴으로 설명하셨습니다. 고통은 마음이 대상과 반응해가는 과정에서 생겨납니다. 그래서 붓다는 어떻게 알아지는가, 어떻게 아는가의 기준으로 세상을 설명하셨습니다. 붓다가 안, 이, 비, 설, 신, 의와 색, 성, 향, 미, 촉, 법으로 세상을 설명하신 것이 이런 이유였습니다.
과학에서 다루는 물질과 불교에서 말하는 물질의 차이를 보면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과학에서는 물질 자체로 물질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컵이 있다고 해 봅시다. 과학에서는 이 컵의 질량, 밀도, 부피, 무게로 이것을 설명합니다. 불교는 이런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통의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컵을 눈으로 볼 때 보이는 것(색),
부딪혀서 소리를 낸다면 들리는 것(성),
어떤 냄새가 난다면 냄새나는 것(향),
혀를 대어서 맛이 난다면 맛 나는 것(미),
닿으면 느껴지는 것(촉),
생각해서 마음에 형상이 나타나면 알아지는 것(법)
으로 설명합니다.
물질을 각각의 감각기관에 어떻게 알아 지는가에 따라서 다르게 정의합니다. 왜냐하면 붓다의 목적이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한 것이고 이렇게 인식하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물질을 설명하는 것이 고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온은 물질(색), 느낌(수), 인식작용(상), 다양한 의지작용(행), 아는 작용(식)입니다.
물질(색)
붓다는 가장 기본적인 물질로 흙의 요소, 불의 요소, 물의 요소, 바람의 요소를 말씀하십니다.
흙의 요소는 딱딱하고 부드럽게 느끼게 하는 성질,
불의 요소는 뜨겁고 차갑게 느끼게 하는 성질,
물의 요소는 응집성을 느끼게 하는 성질,
바람의 요소는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성질입니다.
붓다께서는 눈에 보이는 물질의 경우에는 빨갛게 보이는 성질, 파랗게 보이는 성질, 노랗게 보이는 성질 등을 구분하기 않고 단지 보이는 성질(색) 한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몸에서 느끼는 마음과 함께 작용하는 물질을 흙의 요소, 불의 요소, 물의 요소, 바람의 요소 이렇게 4가지로 설명하십니다. 왜 이럴까요? 단지 느껴지는 성질 한 가지로 말씀하셔도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붓다께서 존재를 설명하시면서 가장 먼저 고려하신 것은 나라는 개체성의 해체였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믿고 살고 있습니다. 몸은 느낌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몸이 나라는 믿음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몸을 해체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딱딱하고 부드럽다고 느끼게 하는 물질을
흙의 요소로 구분하고,
따뜻하고 차갑게 느끼게 하는 물질을
불의 요소로 구분하고,
응집성을 느끼게 하는 물질을 물의 요소로 구분하고,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물질을
바람의 요소로 구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몸을 기본적으로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물질로 이 4가지 물질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물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학적 이해와 같은 시각에서 불교의 물질을 이해하는 오류가 많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의 물질도 미세하게 쪼개어 들어갔을 때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미세한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생겼습니다. 그러지만 실재하는 물질은 실재하는 마음과 같이 어느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모양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고유한 성질이 있어서 조건 되면 고유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아는 성질이 없기 때문에 물질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뜨겁고 차가운 것을 아는 것으로 불의 요소를 안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뜨겁게 느끼게 하고 차갑게 느끼게 하는 성질을 이해했을 때 불의 요소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재하는 물질도 이해되는 지혜의 대상입니다. 뜨겁게 느끼게 하는 성질과 차갑게 느끼게 하는 성질은 하나의 성질입니다. 하나의 성질이기 때문에 불변하는 법이고 불의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차가운 물과 미지근한 물과 뜨거운 물이 있습니다. 미지근한 물은 차가운 물에 비해 뜨겁고 뜨거운 물에 비해 차갑습니다. 한 번은 미지근한 물을 차갑다라고 표현했고, 한 번은 뜨겁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차갑다라고 표현하게 했던 성질과 뜨겁다라고 표현하게 했던 성질이 두 가지 성질입니까? 아닙니다. 하나의 성질입니다. 하나의 성질을 접해서 내 마음의 가치기준에 따라서 차갑다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뜨겁다라고 표현하기도 한 것입니다.
뜨겁고 차가운 것은 관념적 해석입니다. 실재는 그렇게 느끼게 하는 성질입니다. 이 성질은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성질을 이해했을 때 불의 요소를 이해한 것입니다.
실재하는 법은 모두 유동하고 반응하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몸을 구성하는 4가지 물질 이외에도 눈에 보이는 것(색), 귀에 들리는 것(성), 냄새나는 것(향), 맛 나는 것(미), 몸으로 느껴지는 것(흙, 불, 바람의 요소) 등의 물질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질을 우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무더기로 말씀하셨습니다.
느낌(수)
몸에 무언가가 부딪치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몸에서만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나고 귀에 들리는 것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납니다. 코와 냄새나는 것, 혀와 맛나는 것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납니다. 마음과 마음이 부딪쳐도 느낌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 것은 거기에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났을 때 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의 마음과 화를 아는 마음은 다릅니다. 화의 마음과 화를 아는 마음이 부딪치면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 느낌으로 인해서 화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부딪칠 때 어떤 것은 파랗게 알고 어떤 것은 빨갛게 알게 되는 것은 부딪침으로 인해 일어나는 느낌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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