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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무엇이 먼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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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5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2-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하현주 박사의 마음 밭 가꾸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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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하현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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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2-04 14:02 조회 3,1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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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자비정원(慈悲正願) (⑧회)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무엇이 먼저인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철학자인 양주는 위아(爲我)설을 주장해 당대 큰 인기를 얻은 바 있다. 당시 난립했던 제자백가들은 저마다 천하를 구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고통을 받았다. 이를 보며 양주는 천하를 주더라도 정강이의 털 한 올과 바꾸지 않을 만큼 자기 자신을 천하의 제일로 여기고 자신의 생명을 아끼며 살아가라는 사상을 펼친다. 

한편, 묵자는 하늘(天)이 만민을 겸애(兼愛)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도 서로 겸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만 위하는 사리사욕을 타파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리와 이타 중 무엇이 먼저인가에 대한 담론은 현대 심리학으로도 이어진다. 자비는 타인을 향한 것이라는 상식적인 믿음에서 벗어나 미국의 심리학자 네프(Neff)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자비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자기자비(self-compassion)는 남방 불교에서 자애관을 닦을 때, 자기 자신에게 먼저 자애심을 갖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에 착안한 심리학적 구성개념이다. 자기자비는 자기 자신에 대한 친절함, 인간의 보편성, 마음 챙김의 3가지 요인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이 나약하고 고통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점에 공감하고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타인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사랑과 친절을 보내는 수용적인 태도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2003년에 창안된 이래, 자기자비는 최근까지 국내외에서 가장 주목받는 심리학 주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자기자비는 스트레스, 우울, 불안, 분노, 수치심, 자기 비난 등의 부정적 상태를 감소시키고, 행복, 삶의 만족도 등 긍정적 상태를 증가시킨다는 다수의 치료적 효과들이 연이어 보고되고 있다.

자기자비는 자기중심성에 의해 왜곡된 자기비난, 즉 자신만 부적절하고 부족하다는 평가로부터 벗어나, 타인들도 자신처럼 고통받고 있으며, 인간은 보편적으로 취약함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자신의 경험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자기 자비가 긍정 정서를 증진시키고, 이를 통해 사회적 연대감을 높이며, 결과적으로 타인을 향한 자비로도 이어진다는 연구 결과는 자비에 있어서 자리와 이타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자기자비는 불교의 무아(無我)설에 위배된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관점에서, 자리와 이타는 둘이 아니며, 오히려 자타평등의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샨티데바는 「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에서 자타의 구별 없이 자비심에 의해 모든 유정을 구제하는 것이 보리심을 추구하는 이유라고 설하며, 그 근거를 무아에 둔다. 고통의 주체는 본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의 입장에서는 자타의 고통이 구별되지만, 승의의 입장에서는 자타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

집에 불이 났는데 내 방의 불만 끄는 것이 이기주의라면, 이타주의는 제 몸 타는 줄도 모르고 다른 방의 불부터 끄는 것과 같다. 자리이타란 먼저 자기 몸을 불로부터 지키되, 자타 구분 없이 불을 꺼야 나와 남이 모두 안전할 수 있는 이치와 같지 않을까? 

번뇌의 불은 내 한 몸 지키면 당장은 안전한 것 같아도, 금방 옆에 있던 불길이 덮쳐오기 마련이다. 하루하루 내 마음의 불을 먼저 끄되, 타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불길이 꺼지도록 함께 지켜봐 주어야 한다. 

그러나 타인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고통은 내 고통에 접촉했던 경험이 있어야 제대로 보인다. 또한 타인의 고통을 함께하는 자비의 경험 속에서 자타의 구분이 융해되는 순간이 일어난다.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으나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고, 위로받지 못했던 상처들이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며 함께 위로받는다.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에게 과거 혹은 현재의 자신을 대입하고 동일시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리는 결국, 누구의 고통인지 모를 고통이라는 현상을 함께 위무하고 치유해 나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내 고통에만 함몰되어 끙끙 앓고 괴로울 때보다, 타인의 고통을 보고도 이리저리 피하려고 할 때보다, 함께 마주할 때 그 고통은 전보다 덜하다는 것이다. 

입춘이 와도 아직은 시린 2월에는 봄날 새순을 피워내기를 고대하는 겨울나무의 심정으로 이제 막 발아할 자비의 씨앗을 싹틔워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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