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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불시거 지금 나는 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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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40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19-11-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법등정사 총지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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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0-05-20 22:47 조회 5,22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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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금불시거 지금 나는 그 것이 아니다.

“뜰에 심은 저 나무가 매일 자라나지마는 항상 보는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 수행과정에도 매일 성품 좋아지나 항상 보는 사람들은 좋아진 줄 모르지만 오륙 칠 년지나 보면 좋은 성품 보일지라.”

〈종조법설집 P. 147 게송〉 


요즘 사람들은 글을 잘 읽지 않는다. 특히 장문일 때는 처음부터 외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글에는 O.S.T도 없고 또 글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문을 짧게 하려고 한다.

어느 날 논객이 찾아왔다. 그는 밀교의 수행법과 밀교수행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며 물었다. 이에 밀교의 수행법인 삼밀관행법과 육행실천법을 소개하고 '즉신성불'을 말하니,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삼아승지겁 성불’만 알고 있는 사람에게 '금생에 이 몸으로 성불한다.’고 하니 매우 의아해하며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수행의 시간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수행의 질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 얼마나 오랫동안 수행했는가 하는 것 보다 어떤 수행법으로 어떻게 수행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이다. 밀교 성불의 삼종수행과 삼망집의 중생 망상 번뇌와 집착을 여의면 무루의 정보리심이 생하여 출세의 공덕을 성취하게 된다. 즉, 중생 무명의 삼업과 번뇌를 닦아 부처님 같은 삼밀행을 실천하게 되면 금생에 이 몸으로 ‘즉신성불’을 하는 것이다.

수행의 본원이 즉신성불인 밀교의 진언수행자들은 언제나 이런 마음으로 자기 수행을 하고, 이 법으로 교화법을 삼아야 한다. 즉신성불하기 위해서는 항상 일체중생을 위하여 성불하겠다는 생각을 먼저 일으키고 일체법의 공성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며 이런 생각을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일으켜 습이 되도록 해야 하며, 본존을 관하고 삼매를 부지런히 닦아야한다. 삼매를 닦는 사람은 현재에서 불보리를 증득하고 진언법만이 즉신성불하는 까닭에 삼마지법을 설한다. 그리고 수행자는 자기마음 이외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아야만 즉신성불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성불은 아승지겁으로 요원해질 것이다. 취할 바와 버릴 바를 분명히 하고 자기마음 밖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한 길로 닦아가면 자신의 삼업이 삼밀화되고 망집하나가 1아승지겁이라, 삼망집을 소멸하면 이것이 3아승지겁의 즉신성불이 되는 것이니 이렇게 수행하는 진언 행자는 이미 지난날의 내가 아닌 것이다.

‘아금불시거’ 이 말은 중국 조동종의 종조인 양산 동개선사의 오도송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의 이 몸은 그 때 그 몸이지만, 지금의 나는 그 때의 그(는 3인칭 '그' 의 뜻. 즉 지난날의 나)가 아니다.”는 뜻이다. 밀교소의경전인 대일경에 “이 몸을 버리지 않고 신경통을 얻어 대공위 에서 유보하는 신비밀을 성취한다.”고 했다. 밀법의 수행으로 신통경계를 얻고 부처의 경지가 되어 부처님처럼 지혜롭고 자비롭게 행하게 되면 즉신성불을 이루게 된다. 즉신성불의 대도를 걷는 지금의 내가 스스로는 잘 모르지만, 타고난 성품과 짓는 업이 바뀌었고 복과 운명이 변하여 더 좋아지고 향상된 것이니, 이미 그 때의 내가 아닌 것이다. 마치 몰라보게 성큼 자란 뜰 앞의 저 나무처럼. “뜰에 심은 저 나무가 매일 자라나지마는 항상 보는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 수행과정에도 매일 성품 좋아지나 항상 보는 사람들은 좋아진 줄 모르지만 오륙 칠 년 지나 보면 좋은 성품 보일지라.” (종법 P. 147 게송)

즉신성불로 가는 우리 진언수행자는 날마다 좋아지고 향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고 악착같이 닦으며 살아야 한다. 지금 금생에 바꾸지 못하면 죽어서도 가져가니 지은 업을 닦지 않고 어떻게 사나. 애착하고 집착하던 이 몸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면서 무엇을 가져가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동안 강원도 금강산에는 ‘팔만구 암자’라 할 만큼 많은 암자와 수행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곧 성불할 것이라고 하는 한 스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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