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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기부의 삶, 부처님 전 중생회향(衆生廻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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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6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3-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덕화사 승강기 희사 김기태 각자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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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박재원 기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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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3-05 14:18 조회 2,94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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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기부의 삶, 부처님 전 중생회향(衆生廻向)
온 가족 덕화사 교도로 40년, 부처님오신날까지 설치 목표로

1998년 IMF, 2천만 원 쌀 구매로 어려운 이웃 찾아 나눔 실천

제 26회 자랑스러운 부산시민 수상, 불우청소년 돕기에도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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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덕화사 김기태 각자와 윤숙희 보살


어느 한 교도의 큰마음으로 덕화사(주교: 법상인 전수)에 승강기(엘리베이터)를 세운다는 소식에 지난 2월 16일 서둘러 부산을 향했다. 기자로서 사원 내 ‘승강기 설치’라는 사실 보다 설계부터 시공까지 도맡아 희사했다는 교도에 대해 매우 궁금했다. 어떤 분일까, 어떤 마음일까,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예정된 시간에 김기태 각자(67세, 웰빙하우징 대표)와 그의 아내인 윤숙희 보살(현 덕화사 신정회 회장)을 덕화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시 ‘방문객’ 중>


인터뷰 내내 시인 정현종의 ‘방문객’의 시구절이 떠올랐다. 개인적으로는 필자에게 어마어마한 한 사람의 일생으로 다가왔고, 김 각자 부부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감사한 일이었다.


“덕화사와 인연을 맺고 다닌 지 40년이 다 되어갑니다. 누님 세분 중 한분이 몇 해 전 작고한 성화사 김정순 교도인데, 그 인연으로 형제들이 다 다니게 되었고, 아이들도 자라는 동안 함께 신행생활을 해왔지요. 몇 년 전부터 아내가 절에 다녀오면 연로하신 분들이 3층 올라 다니시기가 어렵다 말을 해왔는데, 그 때마다 언젠간 내가 꼭 해야겠다 생각해 오던 것을 이제 하게 되었네요.”


김 각자 말마따나 여유가 있어서 할 수도 있다지만 사실 희사라는 것이 마음이 없으면 어려운 일임은 누구나 안다. 그 마음도 하루아침에 결심을 한다하여 낼 수 없다는 것도 인지상정이다. 그 역시 이번 희사는 가난했던 지난날부터 일찍이 시작된 이웃돕기 자비행과 사회 기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자님은 누군가 어렵고 힘들다면 꼭 도와줘야 하는 사람이에요. 80년도 초반 결혼하고 변변한 살림살이도 없이 덕천 1동 달동네 방 한 칸에 살 때예요. 우리는 저축하나 못하면서도 달마다 동사무소에 얼마 가져다 드려라, 직접 가져다 드려라 했어요. 네 사람한테 5만원 씩 그 돈 액수가 20만 원이나 됐어요. 그렇게 시작한 게 여태까지 한 번도 거른 적이 없고, 93년도 가게를 시작하고는 어려운 청소년들을 돕기 시작했어요. 현재 수십 개 구좌로 매달 170만 원 정도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삶은 초반부터 평탄하지는 않았다. 장남에 5대 독자라는 이유로 군대 제대 후 바로 결혼을 했어야 하는 가정환경 때문에 이들의 삶은 황무지를 개척해야 하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늘 신행에 게을리하지 않으며, 부처님의 법을 꾸준히 실천하는데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남편 말을 듣고 불평불만 없이 함께 살아 온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김 각자의 이웃 사랑이 실천은 계속 될 수 있었다.


“다만 얼마라도 드린다고 약속된 분들은 그 때가 되면 기다리고 계시죠. 저희야 어쩌다 한번 쓸 수 있는 밥값일지언정 그분들의 살림살이에는 지나칠 수 없는 큰 돈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절대 빠트리면 안 된다고 늘 아내한테 얘기합니다. 다행히 의견 충돌 한번 없이 여태 잘해주고 있어서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 각자는 지난 1993년 의류직매장을 차려 생활이 피기까지 10여 년 동안 공장노동자, 화물차운전기사, 의류행상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어려서도 고생은 더 심했다. 


일찍이 사업에 고배를 마신 아버지를 따라 여덟아홉 살 때부터 묘지 관리를 조건으로 받은 땅을 일구며 살았다. 시골에서 중학교를 나오고 부산으로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졸업을 채 하지 못했다. ‘가난함’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남의 사정에도 모른 채 할 수 없는 이타심이 김 각자의 마음에는 늘 자리하고 있었다.


“IMF 때였어요. 아버지께서 요즘 다들 어렵다는데 사업에 보태어 쓰라고 어느 날 2천만 원을 주셨어요. 제가 평소 생활비로 드린 것을 오랫동안 한푼 두푼 아껴 모아 두셨다가 평생 처음 제게 내어주신 그야말로 귀한 돈이었죠. 생각해 보니 저보다 어려운 사람이 많았어요. 아버지께 쌀을 사서 구청에 가져다주면 어떨까요 여쭸더니 흔쾌히 그러자고 하셔서 함께 기증을 했었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쌀 기증을 해오고 있습니다. 쌀로 지원한게 현금으로 따지면 5억 원정도 될 것 같네요.”


우리(?)만 몰랐던 김 각자의 ‘쌀 선행’은 지난 2010년도 제26회 자랑스러운 부산시민상 대상에서 봉사부문 본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져 있었다. 어려운 가정에 ‘사랑의 쌀’과 생필품지원을 비롯해 독거노인 효도관광 및 경로위안잔치 경비를 수시로 지원하고, 2005년 쓰나미 피해국에 의류 3천 여 점의 구호물품을 지원했다. 


2009년에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는 베트남 여성의 입원 치료와 성금을 지원하는 등 국제적 인류애 실천으로 국가적 위상을 높였다. 이를 포함해 비행청소년 교화 및 장학사업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등 지역사회에 귀감이 되어오고 있다는 것이 부산시의 시상 이유였다. 김 각자는 1995년부터는 아동복지전문기관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 결식아동 급식과 도시락을 지원하고, 빈곤아동에게 책가방과 교복 등을 지원하는 등 이웃사랑을 실천해 왔다. 또 이렇게 시작된 청소년 돕기는 2004년도 한국청소년보호연맹 부총재로 들어가서 총재로 활동하다가 서울까지 다니는 상황이 어려워져 작년부터는 명예 총재로서 건강한 청소년사회를 육성하는데도 기여하고 있다.

 

“작년에 간암 수술을 했어요. 뜻하지 않은 사고도 있었고요. 검진도 성실히 받아오고 건강하다고 자부해왔는데. 다행히 우연치 않게 일찍이 발견하게 되어서 회복이 잘 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건강하길 바라고, 덕화사 교도들이 편안하게 불공하고, 많은 분들이 우리 종단으로 교화되면 좋겠습니다. 승강기는 현재 설치 허가 완료 상태고, 올해 5월 부처님오신날 전까지 어떻게든 끝내서 사원과 교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종조께서는 “부유할수록 더욱 근면하고 보시해야 하며 지위가 높을수록 겸손(謙遜)해야 할 것이며, 실천하자면 남의 허물을 보지 말아야 하며 선을 행해도 고자세는 아니 되며, 실(實)다워도 허(虛)함 같이 해야 하며, 있어도 없는 것 같이 해야 하며, 알아도 모르는 것 같이 해야 하느니라.”고 설하셨다.


김 각자 부부의 이타행과 자비행이 종조 말씀과 겹쳐져 아직까지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 부디 건강하시어 더 좋은 일 많이 하시길 서원한다. 

부산= 인터뷰 박재원 기자 

사진 전서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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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사 주교 법상인 전수와 함께 사원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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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사 뒷편 승강기가 설치 될 장소에서 부부가 담소를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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