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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해설’을 배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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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9-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신행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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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이상주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도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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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09-12 14:42 조회 6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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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총지로여는 삶 (2회)

‘숲해설’을 배우고

퇴직을 하고, ‘숲해설’을 공부했습니다.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첫째 숲은 모든 에너지를 태양으로부터 얻는다는 것입니다(솔라시스템). 이 전제는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둘째 숲은 공격과 방어가 아닌 나눔과 상생의 장이라는 것인데, 식물은 생산량의 3/4을 순전히 나누는데 쓴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으면 나무는 독을 만들어 애벌레를 물리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나무가 애벌레를 불러서 잎을 먹이고, 애벌레들은 새를 먹이고 새는 더 큰 포식 동물을 먹이는지는 물어볼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는 순전히 해석의 문제이므로 어떻게 이해해도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초나무는 잎에서 톡 쏘는듯한 상쾌한 향기가 나는데, 이 향기를 맡고 호랑나비가 와서 알을 낳는지, 아니면 나무가 향기를 뿜어서 호랑나비를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또 버드나무 줄기에는 껍질을 공처럼 부풀려 혹파리를 위한 집을 만드는데 이 역시 혹파리가 특정 화학물질로 나무를 이용하는지, 나무가 혹파리의 뜻을 받아들여 방을 만들어 주는지는 둘만이 아는 일입니다. 또 기생식물인 새삼은 다른 식물의 줄기를 감고 거기에 뿌리를 내려 양분을 얻어 먹는데, 허락을 받고 하는 일인지 막무가내로 빼앗는지 역시 둘만이 아는 일이다. 단, 새삼덩굴이 뿌리를 내린 숙주식물들에게 통신망으로 쓰인다는 사실과, 새삼이 숙주식물들보다 먼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아무런 댓가나 염치없이 얻어먹기만 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향기는 식물이 곤충에게 보내는 초대장이라고, 나무 줄기나 잎에 난 혹(충영)은 손님을 대접하는 사랑방이라고, 기생식물의 생태는 더부살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붙이고, 숲을 나눔과 상생으로 해석하였는데, 그렇게 몇 년을 다니다 보니 숲과 나아가 지구 생태계와 인간의 삶까지도 훨씬 편안하게 보는 마음이 자라나게 되어서, 나무를 휘감은 덩굴을 보면 할아버지 목을 감고 재롱을 피우는 손녀딸의 귀여움으로 보고, 나뭇잎을 남김없이 갉아먹은 애벌레들을 보면 잔치에 초대받아 접시까지 싹싹 다 비우고 가는 고마운 손님으로 보이며, 뱀이나 곤충처럼 연약한 동물들이 천적을 피하기 위해 나뭇가지나 꽃, 열매를 따라하는 모습을 천재적 재능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우리 뇌의 활동방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역시 아직 학계에서도 개척영역이어서 어디에도 명료하게 그렇다거나 아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어떻든 우리 뇌는 전두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이성적, 계산적, 이기적, 목표지향적, 중독적, 도파민 중심의 사냥모드와 편도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감성적, 이타적, 비중독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세로토닌 중심의 소화모드로 나눌 수 있다는 가설입니다. 식물에 대한 지식을 외우고 설명하고 가르치는 방식은 스트레스만 높이므로 그만 멈추고, 식물을 감각적으로 경험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행복감을 공유하여 세로토닌 회로를 활성화 시키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후각, 청각, 촉각, 변형된 시각을 활용하여 오롯이 감각에만 집중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견해입니다.


  아전인수식 해석이기는 합니다만, 저는 ‘숲해설’에서 밀교적인 요소를 꽤 여러가지 보았습니다.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태양이라는 사실은 대일여래 사상에 기반하며, 시각적 응시는 관법을, 청각적 감각 활용은 진언법을, 촉각의 사용은 염주의 활용법이 닮아있습니다. 숲에 다녀오는 일만으로도 세로토닌 회로가 활성화된다는 주장은 부처님의 수행이 숲에서 나무를 의지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통하며, 계산적인 뇌를 쉬고 숲과 일체감을 가지고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끼자는 것은 좋은 생각도 나쁜 생각도 말고 거저 쉬라는 육조선사의 가르침과도 매우 닮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것은 숲의 풀과 나무를 보며 나눔의 마음을 느끼고 따라하자는 주장이 이기심을 내려놓고 보리심을 일으키자는 불교의 상구보리 하화중생 실천덕목과 통합니다.


 체계를 갖추어야 밀교이고, 부분적인 방법만이라면 밀교적일 수는 있지만 밀교일 수는 없다는 종조님 말씀대로 ‘숲해설’에 밀교적 요소가 있다고 해도 밀교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삼밀관행으로 즉신성불하고, 생활속에서 현실속에서 보리도를 실행하여 중생들을 행복의 길로 이끄는 일이 밀교 수행자 총지교도의 삶이어야 한다면 그 이름이나 행위가 어떻든 또 다른 수행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가장 다양하고 효과적인 수행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밀교는 가장 현대적이고 가장 과학적인 수행법을 자부합니다. 저와 우리 종도님들의 수행이 익고 또 익어 우리 사회 구석구석까지 여래의 광명으로 널리 비추기를 서원합니다. 옴마니반메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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