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게 되고 느낀 만큼 사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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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59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6-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법문 서브카테고리 이달의 법문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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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6-03 13:40 조회 2,657회본문
진언 염송, 탐 · 진 · 치 번뇌를 없애고 지혜를 밝혀, 머리가 아닌 온 마음과 온몸으로 꾸준히 정진해야
옛날 한 노모에게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병이 들어서 그만 명을 마쳤다.
노모는 아들의 시체를 산으로 실어 날랐지만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며
부르짖었다.
“내가 자식 하나를 두어 늙어서 의지하려 하였더니,
이제 나를 두고 죽었구나. 내가 더 살아서 무엇하랴.
지금 죽어서 한곳에 묻히리라.”
이렇게 다짐하고, 사오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가엾게 여겨 오백 비구를 거느리시고,
산에 가서 노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산에 있는가?”
“오직 자식 하나가 있었으나 나를 버리고 죽었습니다.
애정이 지중하여 함께 죽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노모에게 이르셨다.
“자식을 다시 살리고 싶은가?”
노모는 크게 기뻐하면서 애원하였다.
“어서 살려 주십시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지금까지 사람이 죽은 적이 없는 집에 가서 좋은 향과 불을 구해 오면,
내가 곧 주문으로 기원하여 다시 살리겠다.”
이에 노모가 다니면서 향과 불을 구하려고, 사람을 만나면 먼저 물어보았다.
“이전에 당신 집에 사람이 죽은 일이 있는가, 없는가?”
사람들이 모두 대답하였다.
“선조 이래로 모두 죽었소.”
이렇게 수십 집을 돌아다녔지만 끝내 향과 불을 구하지 못하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돌아와서 여쭈었다.
“두루 다니며 향을 구하려 하였으나,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어서
향을 구하지 못한 채 돌아왔습니다.”
부처님께서 노모에게 말씀하셨다.
“천지가 개벽한 이후로 태어나서 죽지 않은 자가 없으며,
죽은 후에 또 다시 태어나서 사는 것인데,
노모는 어찌하여 우둔하게 아들을 따라 함께 죽으려 하는가?”
노모는 이 말을 듣고 곧 무상한 이치를 깨쳤으며, 부처님이 그 자리에서
널리 경법을 설하시자 곧 수다원도를 얻었으며,
거기에 모인 수천 명이 모두 위없는 바른 도의 뜻을 일으켰다.
『잡비유경雜譬喩經』
이 이야기에서 노모는 어떤 괴로움으로 울며 슬퍼하였는가요?
노모는 부처님으로부터 어떤 설법을 듣게 됩니까?
그 후 노모는 괴로움에서 벗어났는가요?
우리 중생의 온갖 고통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 합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에 이르는 네 가지 고통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미운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 오온에 집착하는 고통을 합하여 여덟 가지 고통이라 합니다.
공부 잘하고, 학교 잘 가고, 취업 잘하고, 결혼 잘하고, 집 사고, 차를 사고, 승진하고, 건강하게 병원 안 가고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욕망이며 조그마한 소원일 것입니다.
이 작은 소망을 이루고자 복을 짓고 선행을 하고 마음공부하고 욕심을 버리는 진언염송을 하고 있지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조그마한 소원 하나도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보통의 중생이라면 태어남으로부터 생기는 삶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가운데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경전 도처에 ‘나’는 ‘오온(五蘊)’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인간의 눈, 귀, 코, 입, 몸으로 구성된 물질요소인 색(色)온이며, 인간의 정신 요소인 감정, 감각과 같은 느낌 작용인 수(受)온이라고 하며, 개념, 표상, 심상의 인식작용을 의미하는 상(想)온,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의지작용인 심리현상들인 행(行)온, 인식판단의 작용, 인식주관으로서의 주체적인 마음인 알음알이를 식(識)온이라 합니다. 이 오온으로 구성된 인간의 실체를 해체해서 보고 진아, 대아, 참 생명 등으로 집착하는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라고 강조하시지요. ‘나’라는 실체가 없기에 괴로움도 없는 것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오온 하나하나의 작용일 뿐이란 것을 노모는 깨달았던 겁니다.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재상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세종 때 이조판서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였고 우의정에 오른 조선의 선비인 맹사성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맹사성은 충남 온양에서 태어나 19세 어린 나이에 장원급제하고, 20세에 파주 군수로 부임했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 우쭐대며 그 고을의 무명선사를 찾아가 인사도 올릴 겸, 그 고을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좌우명 한 마디를 부탁했다.
무명선사는 “나쁜 일 하지 말고 선정을 베풀라.”고 하자 맹사성은 겨우 이런 말을 들으려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하며 일어서 나가려 했다. 그러나 무명선사는 이왕 먼 길을 왔으니 차나 한잔하고 가시라 맹사성을 잡았다.
무명선사는 찻잔이 넘치는데도 계속 차를 따르자 맹사성은 찻잔이 넘친다고 말하자, 무명선사는 “찻잔이 넘치는 것은 보면서 지식이 넘쳐 인품을 그르치는 것은 왜 못 본단 말인가?”라고 혀를 찼다.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은 맹사성은 부끄러워 찻잔도 다 비우지 못한 채 서둘러 방문을 나서다 문지방에 그만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무명선사는 “머리를 조금 더 숙이면 부딪칠 일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일로 맹사성은 크게 깨닫고 한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았으며, 고향을 방문할 때도 남루한 행색으로 그가 벼슬을 하는지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우리가 염송 정진하는 것은 노모가 아들을 잃어버린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과 같고, 맹사성과 같이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만에 빠진 아상과 아집의 고통을 빨리 깨달아 탐, 진, 치 번뇌의 고통을 여의기 위한 지혜를 밝히는 데 진언 염송의 목적이 있습니다. 무식은 암흑이요, 지식은 광명이라 합니다. 총지종에서 말하는 생활불교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 아는 불교를 마음으로 행하고 온몸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육자진언을 염송하는 진언행자로써 머리가 아닌 온 마음과 온몸으로 실천하며 지혜의 등을 밝히고자 살아가는 불자가 진짜 생활 불자입니다. 꾸준히 정진해 나아갑시다. 성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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