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위대한 까규의 수행자, 밀라레빠

페이지 정보

호수 261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08-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정성준 교수의 밀교 인물史

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교수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08-04 16:41 조회 2,841회

본문

위대한 까규의 수행자, 밀라레빠

마르빠가 역경사로서 티벳에 남긴 족적은 적지 않지만 제자 밀라레빠(mi la ras pa)와의 인연과 사제 간에 오간 구도와 시가들은 특히 위대하여 인류가 남긴 종교문헌의 백미로 일컬어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까규빠뿐만 아니라 티벳의 모든 종파에서 존경하고 성자로서 추앙하고 있다. 밀라레빠의 전기는 구전에 의해 전승되다가 15세기 짱욘헤루까(1452-1507)에 의해 결집되었다. 그는 밀라레빠의 탄생시기를 티벳력 임진년(1052), 사망시기를 을묘년(1135)로 보고 있으나, 후대 학자들은 「호롱불교사」에서 추정하는 1040-1123년을 비롯해 탄생연도를 1024, 혹은 1026 등 약간 이르게 보고 있고, 세수 84세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역시 이론이 존재한다.

짱욘헤루까의 기록에는 밀라레빠의 조상은 유목민으로 티벳 북중부 큥뽀에서 살아왔다. 조상중에 닝마의 밀교승인 큥뽀조세가 있었는데 어느 날 사나운 토착신을 조복시키는 과정에서 ‘밀라, 밀라’라고 포효한데서 그의 가계는 ‘밀라’라고 이름하게 되었다. 큥뽀조세는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인 돌제셍게는 도박을 좋아하여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이 네팔 북쪽의 캬앙짜로 이사하였지만 큰 아들 도똔셍게는 지역승려로서 착실히 불사에 힘써 다시 전과 같이 재산을 회복하였다. 형제 가운데 동생 돌제셍게가 결혼해 낳은 아들이 밀라셰랍곌첸이고 다시 그가 낳은 아들이 바로 밀라레빠였다. 아버지는 아들의 탄생을 듣고 매우 기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이름을 ‘퇴빠가(聞慶)’라고 하였고, 아주 어릴 때 동네 처녀인 ‘제세’와 약혼도 하였다. 밀라레빠의 아버지는 일찍 병이 들어 밀라레빠의 숙부와 숙모에게 부인과 밀라레빠 남매의 후사를 부탁하고 사망했는데, 당시의 관습대로 모든 재산은 숙부와 숙모의 차지가 되었고 밀라레빠는 닝마빠 승려에게 공부를 위해 보내졌다. 이때 밀라레빠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숙부와 숙모 집안의 종이 되어 막대한 고생을 하기 시작하였다.

밀라레빠의 어머니인 냥짜칼곈은 원한을 품고 아들인 밀라레빠를 친척인 눕충욘뗀갸초에게 보내 흑마술을 배우도록 하였는데, 스승은 흑마술을 적용할 대상인지를 꼼꼼히 살핀 후 마침내 숙부와 숙모의 결혼식에 참석한 35인을 몰살시켰다. 또한 폭풍우를 부르는 실지를 이용해 수확기에 이른 밀밭을 황폐화시켰다. 밀라레빠는 흑마술이 행해지는 동안 자신이 앉은 방안에 무시무시한 신들이 살해당한 자들의 간을 차곡차곡 쌓는 환영을 보고 크게 놀랐다. 복수를 실현한 밀라레빠는 행복해지기는커녕 큰 회한으로 고통받다가 진정한 불교수행에 뜻을 두고 처음에는 닝마빠의 랑뗀하가를 스승으로 모시고 족첸을 배웠으나 큰 성취를 얻지 못했다. 스승은 당시 남티벳의 호닥에 머물던 유명한 마르빠최기로되(1012-1097)에게 제자를 보내어 밀라레빠는 스승과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되었다. 

밀라레빠가 호닥에 도착했을 때 그는 들판에 서있는 거대한 근육질의 농부를 만났다. 운명의 스승은 자신에게 가장 유력한 제자와의 인연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예지몽을 꾼 이후였기에 제자에게 환영을 보여 그를 맞이했다. 지난 글에서 나로빠가 마르빠를 가르친 수행의 고난을 소개했지만, 마르빠도 제자를 가르칠 때는 불같은 성격과 욕설로 유명하였다. 

마르빠는 처음부터 밀라레빠를 가르치지 않았다. 스승은 갖은 욕설을 퍼부었고, 혹독한 육체적 고통을 안겼다. 스승은 밀라레빠에게 거대한 돌탑을 쌓도록 하였는데, 중간쯤 완성하였을 때 스승은 돌탑을 허물어 버리길 반복하여 무려 6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밀라레빠는 좌절하기도 하고 도망도 쳤지만 결국 되돌아와 고통을 견디고 묵묵히 돌탑을 쌓았다. 마르빠는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밀라레빠에게 자신의 스승인 나로빠가 예언한 제자임을 밝혔다. 그리고 밀라레빠에게 안긴 많은 고초들은 밀라레빠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죄장을 정화하기 위한 일환이었음을 전했다. 지금도 부탄 인근 남 티벳에 호독지역에 밀라레빠가 쌓은 돌탑이 세칼구톡사원에 그대로 남아있다.

마르빠는 처음 오계와 보살계를 받고 법명을 돌제곌첸이라 하였다. 스승 마르빠로부터 많은 밀교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단전의 불을 일으키는 나로육법과 마하무드라, 경궤가 아닌 구전으로부터 비전을 전하는 유가의 전통이 훗날 까규빠 수행의 전형이 되었다. 스승은 제자에게 비밀관정을 전수한 후 외연을 끊고 토굴에서 홀로 거처하며 수행토록 권고하였다. 밀라레빠가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흉가에 유골로 남아있었고 여동생은 구걸로 연명하고 있었다. 밀라레빠는 주로 남 티벳 히말라야 국경지역을 순례하며 수행하였는데, 일부지역은 밀교아사리 빠드마삼바와가 거쳤던 지역과 일치한다. 

밀라레빠는 혹독한 고행으로 몸은 완전히 말라붙었고 가시풀만을 식량으로 삼았기 때문에 몸은 푸른색으로 변했다. 여동생은 밀라레빠의 수행을 말렸다. 밀라레빠는 “세속적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 갈망만을 남긴다. 얻은 것은 사라지고, 쌓은 것은 무너지며, 태어난 것은 죽는다. 이런 이치를 아는 사람은 얻는 것과 쌓는 것, 만나는 것을 포기하고 올바른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성취를 위해 노력한다.”라고 답하였다. 밀라레빠는 9년 만에 대성취를 이루고 여동생을 감화시켜 수행자로 이끌었다. 밀라레빠가 수행했던 동굴들은 훗날 까규빠의 주요 순례지가 되었다. 남서부 티벳의 짜리, 랍치, 카일라스와 히말라야산, 챠끄라상와라딴뜨라의 성지들이 이에 포함되었다. 까규의 전통은 삼장 외에 밀라레빠의 십만송과 같은 수행과 순례, 오도의 구전이 주요한 수행지침이 되고 있다.

밀라레빠는 84세에 열반에 들었는데 사인은 밀라레빠를 평소 질투했던 게셰 짝부와가 여인을 시켜 독약을 넣은 요거트를 공양하였다. 밀라레빠는 독이 든 요거트임을 알면서 먹은 후 여인에게 웃으면서 담보로 받기로 한 보석을 잘 받았는지를 물었다. 밀라레빠는 짝부와와 여인이 지옥의 고통을 받지 않도록 축원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밀라레빠를 화장했을 때 대부분의 사리는 밀교수행자의 수호존인 다끼니가 수습해 가져갔고 남은 약간의 사리와 가사일부, 사탕과 칼과 같은 소도구들만 있었다. 중요한 제자로는 레충빠(1084-1161), 감뽀빠(1079-1153)가 전해지며 이들 뛰어난 제자들에 의해 까규의 법통이 비로소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