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곧 전체요, 전체는 곧 하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생만법一生萬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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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9호 발행인 록경(황보상민) 발간일 2025-08-01 신문면수 15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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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5-08-18 12:01 조회 29회본문
하나는 곧 전체요, 전체는 곧 하나 만법귀일萬法歸一 일생만법一生萬法
3. 정통밀교(正統密敎)는 조직과 체계를 갖춘다. 경전(經典)의 종류를 소승과 대승 밀교로 구분하여 하나하나 검토해 보면 소승(小乘)에 속하는 『장아함경』, 『장부경전』 중에도 『대회경(大會經)』과 같이 밀교적인 것도 있고, 팔리어 성전 가운데는 밀주(密呪)도 있다.
또 초기 대승경전에 속하는 『법화경』은 다라니를 설했고, 본연부에 속하는 『방광대장엄경(普曜經)』도 밀교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밀교적이라고 해도 밀교가 아닌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통력이나 주문(呪文) 등은 밀교적이기는 하지만 밀교는 아니다. 정통적 밀교는 반드시 조직과 체계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유사(類似) 밀교다.
바른 밀교는 인간과 자연계를 완전히 조화(造化)하여 파악한다. 특수한 것 가운데서 일반성을 인식하고, 개개의 류(類)에서 실현(實現)한다. 개개의 인간은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고 모든 인간과의 관련을 가지고 존재하므로, 이것을 밀교에서 중중제망(重重帝網)이라고 한다.
또 인간과 자연계가 따로 다른 존재가 아니고, 인간은 자연계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고 자연계는 인간에 의하여 실현된다. 어느 것이 어느 것에 종속(種屬)되는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종속하는 것이다. 한 조각 풀잎에도 우주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밀교에서는 육대(六大) 사만(四曼) 삼밀(三密)의 법신체(法身體)로 보고 육대연기(六大緣起)라고 하며, 색심불이(色心不二) 즉, ‘당상즉도(當相卽道) 즉사이진(卽事而眞)’의 부정이 아닌 현실 긍정의 교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는 곧 전체요, 전체는 곧 하나이므로 만법귀일(萬法歸一) 일생만법(一生萬法)의 원리에서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고 하며,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事)와 리(理),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의 사법계(四法界)가 그것이다. 인도의 대승불교는 중관파와 유식파의 이파(二派)로서 철학 체계를 수립하고 나란타 대학을 중심으로 번영하였으나 양파 모두 밀교에 귀착하였다. 즉 일즉일체(一卽一切)의 완전한 조화의 세계에 이론적, 실천적 실현이다.
가장 비근한 본능적 무반성의 동물적 생활과 일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공리적 생활에서부터 윤리도덕의 단계를 거쳐 인간의식과 자연현상과의 발전 관계를 더듬으며, 소승에서 대승으로 고양하면서 최후에 절대조화에 도달하는 것이 밀교다. 따라서 밀교 가운데에는 가장 저급한 욕망과 가장 숭고한 이상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잡연하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곳에 있으면서 전체가 일대조화를 구성하여 일대 교향곡을 연주하는 것이다. 잡음(雜音)이나 불조화음(不調和音)도 모두가 오케스트라의 요소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장 원시적인 생활로부터 가장 발달한 차원이 높은 사상과 체험에 이르기까지 그 도중의 모든 단계를 극복하고 절대정신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밀교다. 밀교는 인도불교에서도 중관파와 유식파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즉 소승 대승 모든 교의와 실천을 밟은 뒤에 비로소 밀교가 성립되는 것이다.
비유하면 중·고등학교를 거쳐서 대학에 들어가듯, 소승 대승의 모든 교의를 배우고 또한 실천한 자만이 비로소 밀교에 들어가게 허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도 밀교의 정통을 전해 받은 우리 진언밀교에서도, 또는 티베트의 라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라마교에서도 구사, 중관, 유식 등의 일정한 과정을 다년간 학습한 후에 비로소 밀교를 배우는 것이 허용된다. 이 때문에 밀교를 최상승(最上乘), 또는 금강승(金剛乘)이라고 하는 것이다.
4. 밀교(密敎)는 의궤(儀軌)를 준수하고 염송을 줄이거나 진언(眞言)을 남용(濫用)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존재는 여러 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불이 나던가 위급한 경우에 무의식(無意識)한 가운데 무거운 가재도구를 혼자 들어내는 것을 보면 그 체력이 자기도 모를 정도로 잠세력(潛勢力)을 갖추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운동선수는 훌륭한 코치와 엄격한 훈련에 의해서 감세적(減勢的)인 체력을 개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 조건인 바른 코치와 규율(規律) 있는 훈련을 위반했을 때에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구가 되거나 생명을 잃기도 하는 것이다.
정신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학교 교육도 직업교육도 잠세적인 개인의 능력의 개발을 목적으로 한다. 문자를 모르는 미개사회의 사람이 문자를 볼 때 이상하지만 알고 나면 당연한 것으로 아무 이상할 것이 없다. 평소 모르던 것도 시험공부를 할 때는 모두 기억해 버린다. 이것은 정신을 집중하여 두뇌를 유효하게 사용하는 까닭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평상시에도 이 방법을 쓰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고 하지만 누구든지 연습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체력 개발에 그 방법이 잘못되면 불행을 초래하듯이(예: 입학체력장 시험에 심장마비 등) 정신력의 경우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층 더 위험이 수반된다.
밀교의 근본성전인 『대비로차나성불신변가지경(大悲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대일경(大日經)』 「밀인품(密印品)」에는 월삼매야(越三昧耶)가 엄중하게 금지되어 있다. ‘삼매야’라 함은 산스크리트어의 ‘사마야’의 음사로서, 이 원어는 정직, 약속, 규정, 규율이라는 뜻으로서 ‘어디서 만나자’는 약속도, 국가의 법률도 모두 ‘사마야’지만 여기서는 불타의 서원(誓願)을 말한다.
밀교의 규정에 어긋나는 무자격자에 비법을 누설하면 ‘사마야’에 위배되어 월삼매야(越三昧耶)가 되는 것이다. 이는 법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열기(劣機)가 법을 듣고 감당하지 못하면 당자(當者)의 신체적 파멸은 물론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미혹을 끼쳐서 법을 비방하기 때문이다.[예: 방불(訪佛) 수고(受苦)와 같은 예]
괴테의 시로 일례를 들면 ‘마술(魔術) 쓰는 제자’라는 것이 있다. 어느 날 마술사가 집에 없는 사이에 제자가 마술을 사용하여 빗자루에 물을 길어오라고 명했다. 빗자루는 냇가에 물을 길어오기 시작하여 물이 통에 차는데 그만하라는 주문을 몰라서 중지시키지 못하고 빗자루는 자꾸 물을 길어왔다. 제자는 다급하여 도끼로 빗자루를 두 토막을 내었으나 빗자루는 두 개가 되어 물을 배로 길어오니 집에 홍수가 났다. 제자가 비명을 지를 때 마술사가 돌아와서 중지시켰다.
인간은 자연을 개발하고 원자력을 개발하여 그 이용에 성공하였으나 그 결과는 많은 인간을 파멸에 빠뜨렸다. 정신력 개발의 가능성은 무한하나 선량한 바탕 위에서 개발이 되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자타가 모두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밀교는 항상 오대서원(五大誓願)을 가지고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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