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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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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5-10-16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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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진태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촉탁 연구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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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3-29 11:14 조회 4,40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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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하는 불교
믿는다는것과 깨닫는다는

우리가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무엇을 믿고 빌어서 구제나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어떤 절대자나 신 등에게 기도하여 병이 낫고 사업이 잘되었다는 얘기는 자못 신비 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병이 낫고 사업이 번창하는 원리가 우리가 기도하며 생각했던 그러한 원리대로 된 것일까?

우리는 2X2가 5라고 믿을 수는 있다.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기를 믿을 수도 있고, 해가 북쪽에서 떠서 남쪽으로 진다고 믿을 수도 있고, 천국이나 극락같은 것이 공간적으로 이 지구와는 따로이 있다고 믿을 수 도 있다. 용이 구름속에 있다고 믿고 인어가 바다 어디엔가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으며 어린 아이가 배꼽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는 있다.

일례에 불과하지만 배꼽으로 나왔 다는 얘기는 세살난 귀여운 아이에게는 참으로 아름다운 얘기이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서른이 되고 쉰이 넘어 칠십이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그렇게 믿는다면, 이것은 아름 다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이요 캄캄함이요 서글픔이다.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믿는다면 그가 아무리 학벌이 좋고 부자이며 지위가 높다하더라도 그는 빈약한 내면세계를 가진 한 인간일 뿐이다. 만일 그러한 믿음을 수수많은 사람들이 믿어서 마음 편히 산다고 해도 그것은 진리 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진리는 아니며, 결코 진리는 다수결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믿음은 어리석을 수 있다. 역사상 그러한 어리석은 믿음의 피해자는 수없이 있어왔고 지금도 엄청나게 많으며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도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 인류의 불행한 많은 전쟁과 분쟁과 반목과 질시가 바로 이 어리석은

믿음의 피해자에 의해 자행되어져 왔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미래 에도 그럴 것이다. 끔찍하고도 섬찟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은, 특히 어리석은 믿음은 깨달아 밝게 알게되면 허망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깨달아 아는 자가 어떻 게 2X2를 5라고 계산할 것이며, 적군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 믿고 그에 대한 준비를 게을리 하겠으며, 나아가 자기가 생각하는 용과 언어 가 그대로 실재한다고 허황한 환상 의 즐거움으로 자기의 삶을 마취시킬 것인가? 병은 빌어서 나을 수도 있다. 오늘날의 발달된 의학에 의하면 육체의 병의 70~80%가 정신문제와 직접 관련되어 있다하니 기도 하여 치유될 여지는 그만큼 많다. 실제로 절이나 성당이나 교회나 기도원에서 기도하여 난치병까지 낫게되는 경우를 제법 볼 수 있다. 또 의사가 못고치는 병을 무당이 푸닥거리 를 해서 고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길이 인류가 가야할 궁극적인 길이 아니며, 병이 낫는 원리도 그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나은것 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자작자수이지 기도한 대상의 신력에 의한 것 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병이 낫고 나서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혹 겸허한 것일지 모르나, 모든 것을 그들에게 돌리고 사실이 그대로 그러한 줄 믿는다면 이 또한 어리석음이며 병이 낫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또 다른 큰 문제점을 우리들에게 남길 것이다. 자기의 믿음, 자기의 종교가 최고인 줄 절대시하고 타인의 믿음, 타인의 종교를 무시 하며 적대시하여 서로 싸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 본위의 믿음은 결국 우리 인류를 불행의 늪으로 끝없이 몰고 가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되는 문제는 기도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이것은 병과는 또 다른 면이 있어서 빌어서 될 여지는 거의 없다. 병은 개인의 문제이며 개인의 마음 과 직접 관련된 면이 많아서 기도로 치료될 가능성이 많지만, 부라는 경제적인 문제는 복잡한 사회관계 속에 있는 것이므로 개인의 기도로 는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예를들어, 사업계획을 앞에 놓고 고민에 떠오를 때 그 사업이 성공할 확률이 그 만큼 높다는 정도로 보면 족할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며 기도를 한다고 무슨 기상천외한 영험이 생겨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되겠는가? 그 증거는 인류의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어서 기도를 해서 재벌이 되었다거나 전쟁에서 이긴 적은 없었다.

앞에서 말해온 것은 물론 아무것도 믿지 말자거나 기도를 하지 말자는 얘기는 아니다. 어리석은 믿음, 어리석은 기도여서는 참으로 곤란하다는 것이며, 어리석은 믿음으로 인하여 인류의 수많은 불행과 비극이 있었으며 있으며 있을 것이므로 그러한 그릇된 믿음의 방향으로 치닫 지 말고 깨달아 밝아져야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행복하다 할지라도 어리석은 믿음이어서는 아니되며, 차라리 불행하다 하더라도 지혜로운 깨 달음의 길로 가야만 인류의 밝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물론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 불행할 리는 없지만 그 길을 간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궁극으로 가는 길이 어찌 쉬울까마는 그래도 그 길 밖에 는 없다.

그런데 어리석을 수 있는 믿음의 차원을 넘어 밝은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분명히 제시한 종교와 철학은 내가 알기로는 오직 불교 뿐이다. 불교는 바른 깨달음을 목표로 한다. 초월자에 의한 구제를 거부한 불타는 현실의 고와 깨달음에 의한 고의 멸을 말씀하신다. 믿음은 어리석은 믿음이 되기 쉬우므로 믿음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우리 인류는 깨달음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의 집단이 되어야겠다. 깨달음을 목표로 하지 않는 맹신은 벌써 불교가 아니다. 믿는다는 행위자체에 최면이 걸려 날뛴다면 그것은 불교의 본질을 망각한 것으로서 타종교나 사교집단의 광신과 다를 것이 없다. 터무니 없는 믿음, 우연히 선택한 믿음이 자기의 종교가 되었다고해서 그것을 고수하고 맹신하므로서 얼마나 숱한 인류의 불행과 비극이 있어 왔던가? 이제 우리는 하루 빨리 무명의 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믿음이 아니라 참다운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불자들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정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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