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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선택은 불교의 수행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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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6-07-3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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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04 09:02 조회 5,61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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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선택은 불교의 수행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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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모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얼마전 우리는 한 사건에 연루된 여러 파렴치한들 때문에 온 나라가 부끄러웠다. 그러한 비슷한 사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어제는 여염집 아낙들의 가공할 외도에 온 나라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어디까지 갈런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조상들에게 또 후손들에게 얼굴을 들수 없는 영영 잊고싶은 사건 들이다. 끝없는 무례함의 끝없는 연속이다.

禮는 부끄러움에서 나오는 것인데 오늘날의 우리들은 너무나 뻔뻔스럽다.

모 선생님께서는 좀더 세월이 흐르면 그때의 사람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몰라 사전을 찾아봐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 마따나 그런 날이 며칠 남지 않은 것만 같다. 왜, 이 모양들인가?

오늘날 우리들은 권력이나 돈이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면서기면 면서기만큼의 도둑님이고, 1백억 재산가면 대 부분 그 만큼의 파렴치한이었다.

왜, 그럴까?

많은 이유와 원인이 있겠지만 신앙의 방향과 교육이 제갈길을 잘못 들은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본다. 오직 자기와 자기집안의 命과 禮만을 빌고, 꼭 무엇(예를들면, 높은 지위·큰재산가 등)이 되라고만 교육을 시키니 오늘의 이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자기위주의 이기적인 기도로는 그 기도의 힘이 어떻게 미칠까? 

도둑님이나 파렴치한이 될 수 밖에 없다. 또 무엇이 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므로 자기의 경쟁자와는 적이나 원수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사람들끼리는 친하게 될리가 없다. 서로 갈등하고 투쟁으로 적대시하는 인간들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점들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남을 위해 기도하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 될려고 하기 보다는 참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까에 교육의 중점이 두어져야 한다. 남을 위해 기도하는 아름다운 마음에서 도둑질하는 인간이 태어날리 없으며, 인간되는 교육에서 파렴치한이 생겨날리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상황의 보다 근원적인 문제점은 어디에 있을까?

대부분의 인간들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것은 고대의 서양철학자 에피큐로스의 (행복공식) 곧 (욕망/ 성취)에서 보여지듯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어느정도 성취하느나에 있다. 욕망의 성취도가 높아야 행복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러한 공식도 어느 정도의 진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은면이 더 많은 것으로 이 공식은 무엇 보다고 인간의 욕망을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한 큰 잘못이 있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란 끝이 없는 것으로 처음의 욕망이 성취되자마자 곧바로 모양을 달리해서 커져버리는 성질을 갖고 있다. 물론 그 다음의 욕망도 성취되자마자 또다시 커져버리는 끝이 없는 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상 갈애의 불로 행복을 목말라 하고 끝었는 고통에 시달리게끔 구조지워져 있는 것이다. 이것이 ‘ 一切最善’라는 불교의 진리다.

인간의 제도인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도 이 공식의 분자인 성취에만 촛점을 맞춘 것이었다. 그러한 방향으로는 온 인류가 아무리 달려 가봐야 행복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만족의 길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스승이신 석가모니께서는 여기에서 성취쪽이 아닌 인간의 욕망 쪽으로 문제해결의 방향을 돌렸으니, 이 어 른이야말로 이러한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방법을 우리 인류에게 제시하신 것이다. 대개 분자의 성취는 물질적인 문제로서 이것은 유한한 것이므로 이것의 성취에는 수많은 인간들의 갈등이 있게되고, 여기에서 힘이 있는자가 부정한 방법으로 착취하게 되어 있어 투쟁이 불가피하게 된다. 

그러나 분모의 욕망은 마음의 문제로서 타인들과의 갈등이나 투쟁이 아 닌 자신의 수행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분모의 욕망을 수행을 통해 잘 다스릴때 우리 인간은 비로소 행복해 질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만족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 이다. 예를 들어 욕망이 줄어들때 성취가 고정되더라도 만족도는 높아가며, 극단적으로 욕망이 “0”이 되면 성취는 찬밥 한 덩어리에도 무한의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0 ÷ 1(찬밥 한 덩어리)=00 무한대 이기 때문이다. 

석존께서 제시한 가르침도 바로 이러한 욕망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데 있으며, 그 다스림의 방법이 다양한 수행의 형태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행복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세계에서 살기를 바란다면, 인류는 성취쪽으로만 치닫던 사고를 전환하여 욕망을 다스리는 수행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수행의 길, 그 길밖에는 우리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아무런 대안이 없다. 바야흐로 불교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점에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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