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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제6대 달라이라마 짱양갸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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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4-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 인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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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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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4-07 14:22 조회 2,20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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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영혼 제6대 달라이라마 짱양갸초

제5대 판첸라마에게 받은 비구계 반납 후 사라져
꽁코놀 구금 후 사망설과 탈출 후 은거설 등 혼재
청해지역 활동설도 있으나 역사적 단정은 어려워


티벳의 달라이라마 제도는 인도의 호법왕 아쇼카왕의 못다 한 꿈을 티벳에서 새롭게 펼친 것이지만, 티벳의 역사는 주변국의 부침과 종파의 이해가 겹쳐 결코 순탄치 않았던 달라이라마 활불들의 삶을 보여준다. 달라이라마 가운데 가장 특이한 행적을 보인 것은 제6대 달라이라마인 짱양갸초(tshangs dbyangs rgya mtsho, 1683-1706)이다. 역대 달라이라마는 티벳인들뿐만 아니라 인도와 몽골 등지의 이민족이 지명되는 경우가 있는데, 짱양갸초는 인도 동북부 출신이었다.
제5대 달라이라마의 입적 후 활불인 제6대 달라이라마를 찾는 과정은 제자이자 섭정인 쌍계갸초(1653-1705)에 의해 비밀히 진행되었다. 쌍계갸초는 스승의 명령에 따라 달라이라마의 입적을 무려 15년이나 세상에 알리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티벳을 둘러싼 몽골과 만주, 중국의 외교 관계로부터 티벳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쌍계갸초는 스승의 환생을 찾기 위해 노력하다가 1688년 제5대 달라이라마의 환생인 짱양갸초를 발견하고, 라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초나지역에 격리시켰다. 짱양갸초는 처음에 살루사원 주지의 환생으로 위장했다가 1697년에 제5대 달라이라마의 입적이 공식 발표되면서 비로소 전생 달라이라마의 환생으로 지정되었다.
라사로 이송된 짱양갸초는 제6대 달라이라마직을 승계하고, 제5대 빤첸라마인 롭상계셰(1663-1737)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짱양갸초가 달라이라마직을 승계한 당시 시대적 배경은 만주 강희제의 등극으로 청의 세력이 팽창하면서 몽골과 티벳을 압박하였다. 티벳의 겔룩빠는 제5대 달라이라마 이후로도 여전히 입지가 확고하지 않았다. 1705년 몽골의 라상칸은 섭정인 쌍계갸초를 제거하고, 라사를 직접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정치적 상황을 혐오했던 짱양갸초는 제5대 판첸라마로부터 받은 비구계를 반납하였다. 판첸라마를 비롯한 수뇌부는 적극적으로 말렸지만 쌍계갸초의 간섭이 없었던 짱양갸초는 자살을 하겠다고 위협해 평민이 되려는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평민이 된 짱양갸초는 시를 즐겨 짓고 방탕했으며 술을 좋아하고, 뽀딸라성 남쪽의 숄마을의 매음굴을 방문하기도 했다. 창양갸초는 달라이라마로서 역할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일반 승려의 옷을 걸치고 말이나 가마 대신 걷는 것을 좋아했다. 짱양갸초는 1702년에 이르러서야 수행을 위하여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짱양갸초는 철이 들어 다시 비구계를 받기로 결정하였지만 몽골의 라상칸은 소년인 예셰갸초를 내세워 제6대 달라이라마로 공인하고, 대신 짱양갸초는 라사에서 감금하였다가 북경으로 보냈졌다. 다시 암도지방의 꽁코놀에 구금되었다가 이후 라사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는 열병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일설에는 짱양갸초의 제자인 아왕룬둡달계는 비밀한 스승의 전기를 남겼는데, 여기에 따르면 짱양갸초는 꽁코놀을 탈출해 승려로서 몸을 숨겨 살았다고 하였다. 짱양갸초는 청해지역에 승려로 활동하면서 작롱(Jag rong) 사원을 비롯한 13개 사원을 재건하고 쿠시칸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았다. 또한 제자들도 있었는데, 겔렉갸초(1641-1713)는 세라사원의 주지가 되었고, 아왕잠빠(1682-1762)의 이름도 전하지만, 역사적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제6대 달라이라마 짱양갸초는 인생 전반의 삶을 통해 스스로 원치 않았던 삶을 살았다. 그는 티벳의 불안한 정세 속에 그가 즐기던 작시와 풍류를 희생하였지만, 그가 남겼다는 제자와 종교활동은 그가 실권을 포기한 댓가로 말년에는 종교적 삶에 헌신한 사실을 보여준다. 짱양갸초가 남긴 다음의 시는 승려로서 그의 삶이 바뀌었음을 전하는 것이다.


무상(無上)과 죽음을 마음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아무리 명석하고 지혜가 출중하더라도
결국은 바보와 다름없게 된다, 


한편 몽골의 라상칸에 의해 세워졌던 예셰갸초는 티벳인들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후 제7대 달라이라마로 지목된 것은 1708년 리탕 출신의 껠상갸초였다. 제6대 달라이라마의 순탄치 않은 삶은 현재 티벳에서 일어난 비극과 닮았다. 그 전생을 보여주는 제6대 달라이라마 짱양갸초가 남긴 시에는 그의 못다 한 시인의 꿈과 비원(悲願)이 서려있는 듯 하다. 


하얀 학이여, 그대의 날개를 빌려다오
나는 멀리 가지 않으려니
리탕지역을 한바퀴 돈 후에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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