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전사:정통밀교종단의 발아_한국밀교종단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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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8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3-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창종50주년특집 서브카테고리 총지종의 역사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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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3-07 13:41 조회 2,128회본문
01. 전사:정통밀교종단의 발아_한국밀교종단의 첫걸음
불공법과 의궤 확립, 한국밀교 의식의 기초를 닦다
고려시대 이후 자취를 감췄던 한국 밀교를 이 땅에 새롭게 뿌리내린 불교총지종. 1947년 대한불교진각종, 1954년 대한불교진언종이 창종됐으나 정통밀교로서의 사상과 교리가 충분히 정립되지 못했다. 원정 대성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진각종에서 20여 년간 진력했고 1972년 불교총지종 창종으로 원대한 뜻을 펼쳤다.
민생고와 정신적 공황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정법으로서 밀교의 가르침을 펼친 원정 대성사. 대성사의 원력은 곧 한국 밀교의 중흥으로 나아갔다.
근현대사의 격랑 속 대성사
원정 대성사는 1907년 1월 29일 경남 밀양 다죽리에서 부친 손기현 님, 모친 이근호 님의 2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나라를 잃은 후 대성사의 가족은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에 정착한 부친은 서로군정서 산하 무장독립투쟁단체인 한교공회에서 외교원 신분으로 독립군의 무기를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대성사의 초가삼간집은 독립군의 집회장소가 됐으며 모친은 옥수수 밭을 일구고 감자 등을 심어 가족과 동지들을 챙겼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생존을 위해 숱한 고난을 겪고, 나라를 위해 대의에 앞장선 독립운동가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자란 대성사는 과묵하면서도 진중한 성품을 키워나갔다.
1920년 일본군은 서간도 일대의 독립군 90명을 체포하였고 이때 부친과 형이 끌려갔다. 형은 며칠 후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평생의 지병을 얻었고, 부친은 악랄한 고문과 재판을 받은 끝에 8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이후에도 일본군과 밀정의 감시와 탄압이 이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지자 북쪽으로 떠밀려가기를 거듭하다 1922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불교 관련 책과 경전을 탐독
밀양 백산리에 정착한 대성사는 1924년 대구 유일의 민족학교인 교남학교 고등과에 진학했다. 1927년 졸업 후 강숙이(불명 금강관) 님과 결혼하고 1936년 경남 함양군 학교비위원회 서기로 취직하여 교육예산을 관리했다. 하지만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고 특히 전시동원을 위해 학교물자를 징발하고 인원을 징용하라는 훈령에 순응할 수 없었던 대성사는 서기직을 사직하고 1940년 하얼빈으로 이주했다. 지방법원에서 대서 업무를 맡다가 이듬해 사촌의 제안으로 정미소를 공동 운영하며 도정조합과 미곡배급조합 이사장을 맡아 사사로움 없이 일을 처리했다. 이때 중국과 일본 불교계의 새로운 흐름에 주목하며 불교에 관심을 갖고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조국의 해방을 예견하고 1944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적십자사 경남위원회 군서기로 근무했다. 해방 후에는 밀양공립농잠중학교 행정관으로 일하면서 불교에 대해 더 깊이 탐구했다. 좌우의 극한 대립과 갈등을 지켜보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길이 있다고 확신하고 불교 관련 책과 경전을 탐독했다.
중생 구제, 대자비의 서원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달랐고 놀라운 기억력과 문필력을 갖춘 대성사는 생계를 위해 관계와 교육계에서 일하는 틈틈이 불교경전에 천착했다. 한국전쟁의 참혹함과 중생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도한 후 호국불교를 통해 나라를 구하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자비의 서원을 가슴에 품었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는 대성사에게도 휘몰아쳤다.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던 아들의 행방이 묘연했다. 한순간에 소식이 끊긴 아들의 행방을 백방으로 찾아봤지만 허사였다. 자식의 생사를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한 보살로부터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면 응답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날부터 간절하고 지극한 일념으로 기도했다.
대성사의 아들은 피난길에 떠밀리다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갔고 포로로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와 영천 포로수용소를 전전했다. 한 번은 포로수용소 내에서 서슬 퍼런 인민재판이 열렸을 때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나서 대성사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도왔고 대성사의 부친이 독립운동을 했던 사실을 알려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순간들을 숱하게 겪었지만 원정 대성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듯 훗날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회당 손규상 대종사와의 만남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기도하는 대성사의 모습은 금세 마을 사람들에게 퍼졌다. 도인이 났다는 소문이 인근에 파다했다. 기도 일념일 때는 물론이고 일과 중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얼굴과 눈에서 빛이 났다. 대성사를 만나려고 집과 학교로 찾아오는 이들이 늘어갔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회당 손규상 대종사가 밀양으로 직접 찾아왔다.
두 성인은 단번에 마음이 통했다. 1947년부터 경북지역에서 ‘참회원’을 열어 육자진언염송의 공덕과 참회로써 병고에서 벗어나는 법을 가르치던 회당 대종사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원정 대성사는 신흥종단의 교리적, 역사적 정체성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적임자였기 때문이다. 회당 대종사는 자신은 바깥일을 도모할 테니 안으로 교리와 수행체계 및 교단을 정비해달라고 부탁했다. 함께 밀교 교법을 펼쳐 종단을 일으키자고 했다. 두 성인은 손을 맞잡고 중생제도에 전념했다. 대성사는 1953년 밀양공립농잠중학교 행정관 일을 접고 회당 대종사가 주석하던 서울 왕십리 심인당에서 교화를 시작했다.
진각종 초대 사감에 오르다
1954년 시비와 분란 끝에 ‘대한불교진언종참회당교도회’가 결성되고 법정다툼까지 발생하자 흔들리는 교단을 안정시키는 데 전력을 다했다. 대성사는 1956년 진각종 초대사감으로서 각종 규정을 만들고 업무를 정비하여 내부의 불협화음을 바로잡았다. 1957년부터 역경사업의 틀을 잡고 ‘심인불교 금강회 해인행’ 출판사를 설립하여 경전 간행 업무를 시작했다. 한문 경전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 영어 문헌까지 찾아 경전을 선정하고 우리말 번역을 시작했다.
회당 대종사가 사원 건설과 대중 교화에 매진하는 동안 원정 대성사는 종단의 교리와 조직 체계를 마련했다. 회당 대종사가 주축이 된 심인불교(心印佛敎)는 밀교를 표방했지만 부족함이 많았다. 교법을 정비하고 조직과 체제를 갖추는 일이 시급했다. 간략하게나마 한국 밀교의 역사를 정리한 『총지법장』을 비롯해 『법불교문』, 『응화방편문』, 『응화성전』 등 한글 위주의 경전과 교리서를 편찬하고, 진각(眞覺), 심인(心印), 심인당(心印堂), 정사(正師), 전수(傳授), 총인(總印) 등의 핵심적인 용어를 창안하여 종단 체계를 정립했다. 각종 불공법과 의궤, 진언의 규정을 확립하여 한국밀교의식의 기초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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