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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자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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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6-07-3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신행일기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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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김홍균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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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05 08:28 조회 5,4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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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자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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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종교가 있느냐?”

어쩌다 이런 질문에 접할 때마다 선뜻 “그렇다”라는 대답을 하지 못 한다. 생전에 그토록 부처님을 믿으셨던 어머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고, 지성으로 염송하는 집사람에게 이끌려 총지종을 찾은지 십년이 다 되어 가건만 스스로의 신앙심에 자신이 없는 까닭이다. 어느 자리에서 건 종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침튀기며 불교의 입장을 옹호하 면서도 나 자신을 불자로 여겨본 적은 없다.

절에 다닌다 하여 불자라고 불러 준다면 좋기는 하다. 그러나 누군가가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얼마나 실천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바로 그 말에 나는 대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이 오염된 세상에서 바글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저 내 앞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사람이 아닌가.

시간에 내가 서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상영식 왕생성불…겁적 원리…지혜복덕…차량운전 무사고… 건강장수 사바하…. 이 얼마나 이기 적인 바램인가! 그래, 부처님께 매달려 개인의 행복만을 보장받고자 애쓰는 것이 불자의 소임이겠는가? 어디 부처님은 그저 빈다고 들어주시는 분이던가? 무지한 나로서는 부처 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불교라는 종교가 적어도 개인의 행복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순전히 사적인 성공을 보장받는 수단은 아닐터. 진정한 불자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 일상에 대한 참회가 서원에 앞서야할 것이다. 

“이전에 내가 지은 모든 악업은 무시로 탐진치에 연유하여서….” 읊조 림만으로 참회가 될 수만 있다면야! 아주 모르는 바는 아니다.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이제는 상식이 되어버린 부처님의 큰 가르침 —자비심. 누군들 모르랴. 그러나 아는 것은 아는 것일 뿐 그것이 결코 행함은 아닌 것을”,. 행하지않는 자가 어찌 불자 일까? 그렇다, 나는 솔직히 행함에 자신이 없다. 누구나처럼 불우이웃 돕는 성금도 내라면 잘내고, 우연히 기회가 있으면 힘든 사람을 거들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런일 자체가 사치일 정도로 내 생활의 희생엔 인색하다. 

손해보기 싫어하는 내 마음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 어쩌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같은 매체들을 통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진정 감탄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든다, 어찌 감히 불자라고 자처할 수 있느랴.

어느 정도 배웠다고 유식한체 하는 것도 흠이리라. 색증시공 공즉시색, 불생불멸 부증불감......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니 물질은 에너지요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상대성 이론이 예 있지 아니한가?라고 멸함이 없고 더함도 덜함도 없다하니 우주의 질량은 불변이라는 과학적 법칙이 반야심경엔 이미 설파되어 있더라. 

다른 사람도 다 알고 있으련만 혼자 깨달은양 떠들다가도 일상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본시 그 형체가 없다는 물질을 탐하고 소유욕에 얽매이니 행하지 못하는 앎이란 부끄러움만 더해줄 뿐.

하기야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나 하나 뿐이랴. 중생이란 본시 어리석은 존재가 아니던가?

이렇게 속 편한 변명으로 갈등과 번민을 드어버리는 하루 또 하루. 고해의 바다는 끝이 없으되 눈만 돌리면 바로 언덕이 보인다더라만 내 마음은 아직도 먼 수평선을 향하고 있으니 언제쯤일까? 사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지향하며 진심으로 정진할 수 있는 날은. 물욕으로부터 초연하여 지족할 수 있는 날은. 자신에 게 ‘나는 불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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