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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시켜준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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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6-07-3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영험담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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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박승자 필자법명 - 필자소속 만보사 필자호칭 - 필자정보 만보사 신정회 회장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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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05 08:35 조회 5,1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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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시켜준 부처님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라면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지워지지 않는 멍을 갖고있을 것이다. 같은 민족간의 유혈전은 나라로 봐서도 큰 불행이 었지만 국민 개개인에게도 더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남으로 침략해오기전까지 우리집은 유복했다. 당시 우리집은 서울에서 기계공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든 가족간의 화목에서든 남부러울게 없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날 여동생이 낯선 사람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동생을 찾기 위해 우리가족은 사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를 감당하지 못한 어머니는 마침내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좋은 약은 다 써보고 유명한 의사에게 진찰을 받아보았지만 조금의 차도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 병구완에 집도 공장도 남에게 넘어갔 며, 우리 가족은 길거리로 나앉을 형편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벌러 나갔다. 일어에 능통해 일본인가이드를 해서 누워 계신 어머니를 봉양하고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했다.

어머니는 18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고 대소변도 받아내야 했다. 나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어머니가 정신이 없어 자신의 머리를 벽에 찧어 온몸이 멍으로 얼룩진걸 보고는 울음을 토했다. 차라리 돌아가시면 훨씬 편하실 것 같았다. 어머니의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었다.

어머니를 위해 매일 육자대명왕진 언인「옴마니반메훔』을 외었다. 어머니의 고통이 감해지길 간절히 기원하며 하루도 거르지않고 불공했다. 밀교와 인연을 맺은 것도 어머니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고통을 덜받게 하기 위해서. 나의 불공이 이뤄져서인지 어느날 어머니는 아주 편안한 얼굴로 이승을 떠나셨다.

나는 52세가 되도록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병구완과 동생들 뒷바라지로 결혼은 엄두도 못내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안계시고 동생들도 더이상 나의 도움이 필요없게 되자 나는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불공했다. 역시 불공의 결과는 좋았다. 나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을 만나 늦은 결혼을 하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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