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 중 · 일 불교우호교류회의 참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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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8-01-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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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0 17:55 조회 4,638회본문
세계평화와 불법홍포를 위한 교토대회
제3회 한중일 불교교류회의 일본대회의 참관단의 일원으로서 대회에 참가했던 화령 법장원 연구원을 통하여 대회의 모습과 일본의 대표적 사찰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 그리고 일본의 문물에 대하여 느낀점 등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한중일 불교교류회의는 불교를 통하여 한중일 삼국의 우호를 다지고 과거의 홀어발했던 삼국의 교류를 계승 발전시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도모하고 나아가서는 전세계에 불법을 널리 알리므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하여 불국정토를 이루겠다는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지난 95년에 발족 하여 제1 회 대회를 중국 북경에서 치루헜으며 제2회 대회는 작년에 서울에서 개최되었고 다시 올해 일본 쿄토에서 제3회 대 회가 개최되었다. 본종에서는 매년 대표단과 참관단을 파견하였으며 이번의 일본 대회에서는 특히 개회식에서 효강 법장원장이 보충연설을 통하여 삼국 교류의 구체화에 대한 제언을 하므로서 대회 참가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고 종단의 위상을 드높였다.
- 편집자 주 -
10월 26일에서 30일까지 4박5일에 걸쳐 거행된 이번 대회를 통하여 일본 불교의 모습을 외형이나마 개략적으로 살펴보게 되었음은 본인으로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바쁜 종단 업무에도 불구하고 참관단으로 선발하여 안목을 넓힐 기회를 주신 종단 관계자 여러분에게 이 기회를 통하여 감사를 드린다.
대표단과 참관단은 10월 26일 아침 8시에 김포공항에 집결 하여 출국 수속을 마치고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날씨가 쾌청하여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이 선명하다. 이륙한지 얼 마 되지 않아 벌써 남해의 끝이 보인다. 이렇게 좁은 땅덩어 리에서 여러 지역으로 나뉘어 감정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이 한심해 보여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려 다보는 우리 나라 산천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 다. 일본의 산맥은 그저 밋밋하게 보이는데 우리나라의 산과 골짜기는 오목조목 조화가 무궁하다. 기내식을 먹고 나니까 곧 착륙할 시간이 되었다. 내린 곳은 오사카에서 얼마 떨어지 지 않은 간사이 국제공항으로서 바다를 메꾼 인공섬이 라고 한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안내원이 깃발을 들고 우리를 마중하러 나왔다. 어디에 가나 깃발을 앞세우고 다니는 일본인들을 많이 봤는데 여기에서도 안내 깃발을 보니 일본에 오기는 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쿄토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곳은 일본 정토종의 총 본산인 지은원이라는 절이었다. 일본 정토종은 법연상인이 채종했으며 본산인 지은원은 1234년에 그 제자인 원지가 세웠다고 한다. 이후 덕천막부의 세력을 등에 업고 성장하여 지금은 일본의 최대종파의 하나라고 한다.
절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특히 본당이라고 할 수 있는 어영당은 1639년에 세워졌다는데 우리나라의 웬만한 대웅전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웅장했다. 이 절의 특이한 것 중의 하나는 막부의 영향 때문인지 건물의 곳곳에 무사들이 대 기하는 방이나 밀실이 있어 여차하면 뛰쳐나와 칼을 휘둘렀다고 한다. 나무로 만든 복도도 자객의 침입에 대비하 여 일부러 삐꺽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 도록 만들어 놓았다. 오직 평화만이 감돌아야 할 신성한 부처님의 전당에 칼 바람이 휘몰아쳤다는 상상을 하니 갑 기 섬 해진다. 어쨌든 권력을 배경으로 이렇게 웅장한 사찰 이룩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본 불교를 지탱하는 큰 힘이 되고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나 할까? 다만 큰 병화를 입지 않고 절들이 보존되어 온 것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시간이 없어 사찰의 구석구석을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옛모습 이 잘 보존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큰 사찰들이 주위의 조화를 무시하고 경내에 마구잡이로 신축하는 것과는 대비가 된다.
지은원에서는 정토문주이며 지은원문인 나까 무라 고오류스님이 영접해 주었는데 92세의 고령 이라 몸은 약간 불편하나 참다운 수핸자의 모습이 역력하여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분이었다. 나까무라 스님은 인사말 을 통해 일본불교의 뿌리가 한국이며 한국을 일본 불교의 어머니로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정치, 문화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가 과거에 한국에 대하여 갖가지 만행을 저질렀는데 여기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일본 의 양심은 아직도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불교를 통한 각국간의 유대가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불교인은 이렇게 양심적인데 왜 정치인들은 그처럼 자기들의 잘못을 은폐하며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지 그저 안타까 울 따름이다. 지은원을 둘러 보고 바로 숙소인 파크 호텔로 들어왔다. 쿄토에는 절이 1300여개소나 된다고 하며 오전 9시에 문을 열고 4시에 문을 닫아 건다는 점이 우리와는 달랐으므로 더 둘러보려고해도 어려웠다. 식사는 일본식으로 했는데 입맛에 썩 맞지는 않았지만 일본 음식은 눈으로 먹는다는 말처럼 보기에는 좋았다.
그리고 음식의 성질상 우리와는 달리 잔반이 거의 남지 않게 만들어져 있어 음식 찌꺼기 때문 에 골머리를 앓는 우리 보다는 식후 처리가 간편할 것 같았다. 일본인들의 절약 정신은 호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어 물을 아껴쓰고 수건도 가능하면 여러번 쓸 것을 권장하는 안 내문이 여기저기에 붙여져 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일본식 정원이 오밀조밀하게 가꾸어져 있다. 꾸미는데는 일가견이 있 는 일본 사람들. 동네 어귀의 조그만 짜투리 땅에도 돌과 나
무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너무 인공적인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런 공간이 있으면 어느새 쓰레기로 가득 차 버리는 우리네 사정과 비교하면 한결 나은 셈이다. 교토는 저 녁 8시만 되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기 때문에 달리 가볼 데도 없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둘쨋날인 27일에는 일본의 재가불교인 입정교성회 경도교회에서 거행된 개회식에 참가하여 각국 대표의 연설을 들었다. 입정교성회는 1938년에 창립된 재가불교로서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여 교세를 떨치고 있는 신흥종단 인데 일본에서는 여느 교단 못지 않게 규모가 크다고 했다. 재가자들만으로서 이렇게 큰 종단을 이룩한 것도 일본 불교의 한 특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불교도 삭발하고 승복을 걸쳐야만 대접을 받는 풍토를 하루 빨리 벗어나 생활 자체를 불교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 종단의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라는 적극적인 실천자 세는 앞으로 더욱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행사를 도우고 있 는 입정교성회 신도들의 친절함과 여러 가지 정성어린 배려 들도 본 받을만 했다. 개회식에서는 특히 본종의 효강 통리원 장이 보충연설을 통하여 각국의 실질적인 교류를 촉구하고 문화, 학술 등에 걸친 인적교류를 역설하여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오후에는 비예산 연력사를 방문했다. 일본밀교는 진언종을 중심으로 하는 동밀계통과 천태종을 중심으로 하는 태밀로 나뉘어지는데 연력사는 천태밀 교를 세운 전교대사 최징에 의하여 창건된 절이다.
연력사는 전교대사에 의하여 788년 근본중당이 세워 진 이래 1200여년에 걸쳐 꾸준히 맥을 이어 왔으며 일본 불교의 대부로 자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요문화재 를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사찰이라고 한다. 안내하는 스님의 말에 의하면 일본불교의 대부분의 종파는 이 연력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 자랑스러운 것은 전교대사가 당에 유학하여 태장계 계통의 밀법을 받아와 연력사를 창건했는데 그 밀법을 전해준 이가 다름아닌 신라의 의림선사이다. 즉 신라의 의림선사가 당에서 태장계의 밀법을 순효 아사리에게 전해주니 이 순효아사리가 전교대사 최징에게 법을 전하므로서 신라의 의림선사는 전교대사의 할 아버지 뻘 되는 스승이 된다. 이렇게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 불교의 바탕에는 늘 우리나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를 기어코 부정하며 중국에서만 영향을 받은 것처럼 부정하는 일부 학자들의 편견이 가여울 뿐이다. 아무튼 연력사는 일본 불교의 뿌리 답게 규모가 웅장하고 경내가 넓었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의 건축물이 우리나라의 사찰처럼 단청을 칠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는데 습기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일본의 산은 산세가 우리나라처럼 아기자기 하고 그윽한 맛이 없다. 대부분의 산이 그저 밋밋하게 뻗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건물도 웅장하게만 지었을 뿐이지 우리 나라의 고찰처럼 볼수록 감칠 맛이 나고 안기고 싶은 그런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하나 부러운 것은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 려는 일본인들의 정성이다. 우리처럼 불사를 한답시고 주위 와 어울리지 않게 무조건 크게만 지어 조화를 깨뜨리고 구조 물을 설치하여 보기 흉하게 하는 무식한 짓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전통을 아끼고 사랑하며 철저하게 보존하는 일본인 들의 태도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 같다. 한국에서 왔다고 특별히 주지스님으로 부터 차대접을 받고 비예산을 떠났다. 저녁에는 쿄토의 미야코호텔에서 열리는 환영리셉션에
참가했다.
각 나라의 대표단과 참관단이 어울려 식사를 하며 우의를 다지는 시간이었는데 언어의 소통이 좀 더 원활했더 라면 우의도 더욱 돈독해 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지만 그러 한 한계를 초월하여 다 같이 부처님의 제자라는 공동체적 의 식하에 세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평화를 기원하고 불법을 홍포하기를 맹세하는 모습은 더 없이 흐뭇한 광경이었다. 우리 보살님들은 한복을 차려 입고 참석하여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우리 옷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했다.
대회 3일째인 28일에는 세계평화기원법요식에 참석하기 위해 나라의 동대사로 향했다. 나라라는 지명은 우리나라의 ‘나라’ 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며 우리나라 고대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이다. 많은 유적지 와 문화재가 남아 있는 곳으로서 우리나라의 경주에 비견되는 지방이다. 이곳 나라휴는 경주와 자매결연을 맺은 곳이기 도 하며 지금도 상호 교류가 활발하다고 한다. 담징의 금당 벽화가 있는 법륭사호 이곳 나라지방에 있다. 동대사는 일본 4대사찰의 하나로서 원래는 화엄, 삼론, 법상, 율, 성 실, 구사, 진언, 천태등 8종을 겸한 도량이라고 전해져 왔는데 지금은 화엄종의 총본산이다.
우선 건물의 규모가 너무 압 도적이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건물의 아름다움에 있 어서는 우리나라의 고찰보다 낫다고 할 수 없지만 규모면에 서는 정말 웅장했다. 이렇게 큰절이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일본의 풍토에서 잘자라는 스키목(삼나무)이 많기 때문 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고찰이 있는 산주변에 자라는 삼나무 들은 수백년이 된 것들로서 둘레가 보통 몇미터를 넘는 것들이다. 동대사의 웅장함도 그런 나무 돌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동대사에도 우리 조상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대사가 창건되고 신라스님 심상이 이 절에서 최초로 화엄경을 강의했다고 한다. 동대사가 화엄 종의 본산이 된 것도 아마 그런 인연이었던가 보다. 본당 안 에는 비로자나불을 모셨는데 그 규모 또한 대단하여 보는 사 람들을 압도했다. 세계평화기원법회는 각국의 고유 법요식에 따라 이 세계에 전쟁과 질병, 고통이 사라지고 부처님의 가르침 아래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되기를 기원하며 한중일 불교의 교류가 더욱 활발해지고 우의가 돈독하기를 바라는 내용의 발원문이 이어졌다. 이러한 큰 대회를 통하여 우리나라의 불 자들도 집안 싸움만 할 것이 아니라 시야를 확대하여 진정으로 인류에 봉사하고 정법을 펼 수 있는 참불자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오후에는 담징의 벽화로 유명한 법륭사를 방문했다. 이 절은 일본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유서깊은 절이다. 일본 의 성자로 받들어지며 독실한 불자였던 쇼토쿠태자와 그의 부친에 의하여 607년에 건립된 이 절은 우리 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담징의 금당벽화로서 유명하다.
관세음보살상이 그려진 금당의 벽화는 부드러운 선과 우아한 미소등이 일품이다. 1949년의 화재로 인하여 상당한 훼손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본의 안내책자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내용은 하나도 없다. 담장의 이름은 물론 이 절의 창건주인 성덕태자의 스승 이 고구려의 혜자스님이었다는 말도 없다. 담징스님은 일본에 종이 · 붓 · 먹 만드는 법과 그림을 가르치므로서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일본서기에 나와 있음에도 한 마디 언급이 없는 것은 못내 섭섭하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끼친 영향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극히 꺼리는 것으로 보아 일본사람들은 우리에게 심한 문화적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아무튼 일본의 곳곳에 우리 민족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흐뭇하다. 그러나 한편 훌륭한 문화를 일본에 전하여 그들의 문화를 꽃피운 그 시절의 영화는 어디가고 도리어 일본으로부터 쓰레기 같은 저급문화만 수입하는 지금 의 세태를 보면 서글픈 감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대회 나흘째인 29일에는 고야산을 방문했다. 고야 산은 일본 최대종파의 하나인 진언종의 본산이 있는 곳으로 서 일본밀교의 개창자인 홍법대사 공해가 816년에 금강봉를 창건하므로서 개창된 곳이다. 그 후 사찰이 잇따라 건립되어 지금은 일본 최대의 밀교도량이 밀집해 있는 곳이다. 400여개의 가람이 해발 1000미터의 고야산 분지를 중심으로 산재해 있으며 무수한 참배객이 연중 내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고야산 방문객을 위하여 산 마루까지 철도가 놓여져 있으며 금강봉사를 중심으로 한 절 마을에는 병원, 우체국, 은행등 없는 것이 없다고 한다. 절이 들어 서모로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된 것인데 이렇게 높 은 곳에 감히 이처럼 웅대한 사원을 건설하려고 꿈꾸었던 공 해의 혜안에 놀랄 뿐이다. 밀법의 금강같은 원력이 아니었으 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고야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대문에서부터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는 근본대탑등 모든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이곳 고야산 뿐만 아니라 그동안 둘러 본 일본의 사찰은 모두 규모면에서는 정말 압도적이다.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종교건물이 웅장하면 그 앞에서 왜소함을 느끼게 되는 인간심리는 어쩔 수 없다. 공해는 중국에 유학하여 혜과 아사리로부터 이른바 금강, 태장의 양부대법을 전수받고 돌아와 나름대로의 밀교 이론을 전개했는데 그로부터 발전된 일본 밀교는 현재 고야산을 중심으로 무수한 계파가 뻗어나가 현재는 일본 불교의 큰 산맥을 이루고 있다. 통 불교속에 흡수되어버린 우리나라의 밀교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교세가 왕성하다. 우리가 갔을 때도 수많은 참배객들 이 줄을 잇고 있었으며 명찰을 찾아다니며 순례하는 행렬이 속속 들이닥치고 있었다. 일본의 밀교가 이렇게 번성함에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고야산의 풍경중 하나 특이한 것은 공해가 입적했다는 오꾸노잉의 양쪽에 늘어선 묘지였다. 우리나라와 같은 묘지가 아니라 조그만 탑아래 유골만 봉안한다고 하는데 그 런 것이 10만기가 넘는다고 한다. 탑아래에는 조상 대대로 유골만 봉안하기 때문에 공간도 적게 차지하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온 가족이 참배할 수 있게 되어 있어 무척 편리하다.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화장제도가 정착되어 국토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부처님 정신에도 맞고 뒷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될 것이다. 시간이 부족하여 여러 군데를 자세하게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천년이 넘는 고찰들이 병화를 입지않고 고스란히 보존되어 온 것이 부럽고 우리처럼 경내에 보기 싫은 구조물을 설치한다든지 조화를 깨뜨리는 터무니 없는 불사는 없는 것 같았다. 가는곳 마다 밀교적 색채가 뚜렷하고 특히 불단의 장엄은 우리 종단도 연구해 보아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된다. 모든 법식을 간소화하여 법을 전하는 것이 우리 종단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신심을 고취하고 경건한 마음을 배가하기 위해서는 전통을 되살려 교화에 응용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날은 밀엄원이라는 곳에서 숙박했는데 신의진언 종의 개조인 카쿠반상인이 세운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법당 이외에도 숙식이 가능하도록 시설이 되어 있는데 전통 일본식 음식에 다다미방에서 수면을 취했다. 다음 날 새벽에는 밀엄원내의 본당에서 일본식으로 법회를 보았다. 법당의 꾸밈새는 우리나라와 상당히 달랐고 내부가 무척 어두웠다. 명암의 대비를 강조하여 본존만이 오롯이 드러나도록 한 것이 인상 깊었다. 법요식은 비록 일본어로 진행되었으나 상당히 엄숙하고 경건했다. 불교는 역시 어디가나 깊이가 있는 종교인가보다. 8시경에 고아산을 출발하여 우리가 내렸던 간 사이 공항으로 되돌아왔다. 도중에 차창 밖을 내다보니 시골 풍경이 보이는데 장난감 같은 일본식 집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모습이 무척 귀엽게 느껴진다. 스치며 지나오는 대로 변을 보아도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다. 이렇게 깔끔하고 싹싹한 일본인들이 한목소리를 내면 왜그렇게 터무니 없는 떼를 쓰는지 두고두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무쪼록 일본에도 부처님의 자비광명으로 평화가 깃들고 인류에 도움이 되는 민족으로 남기를 기원하며 일본땅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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